'책상은 책상이다'의 노인처럼 우리집 '식탁'은 '책상'이 된 지 오래이다. 언제부턴가 책과 고지서, 잡동사니들이 수북이 쌓였다. 며칠 전 그 위에 펼쳐진 남편의 카드 청구서를 보았다. 일부러 그렇게 놓은 것처럼 다른 글자보다 크기가 큰 사용액이 한눈에 보이도록 펼쳐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는 언제부턴가 쭉 그렇게 해왔던 것 같다.
내게도 카드가 있고 청구서가 오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혼자 본다. 카드 청구서처럼 은밀한 것이 또 있을까. 매월 그걸 보았으면서도 그날따라 그가 일부러 청구서를 보란 듯 펼쳐놓았을 거란 의심을 해보았다. 맞벌이인 우리는 되도록 반반씩 부담하려 노력해왔다. 그런데 내 속에는 데이트를 할 때 데이트 비용의 많은 부분을 남자가 냈듯 생활에 들어가는 비용도 남편이 더 부담해야 한다는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다 목돈을 내놓을 때면 남편 앞에서 생색이란 생색은 다 냈다. 그의 청구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힘들게 일하고 있지만 저축액이 모이지 못하는 것은 보다시피 이렇듯 큰 살림 규모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그린필드의 글에서처럼 자본주의가 별다른 동기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동기를 부여하여 핵가족을 이루도록 한 것일까. 재생산과 상품의 분배, 소비를 위해? 책상도 식탁도 아닌 곳에서 좀 혼돈스러워졌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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