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쉰 여덟 번째 되는 6.25입니다. 하지만 좀 엉뚱하게 예술이나 학문에서 시점과 거리가 중요한가부터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새로운 시점과 거리에서 보지 못한 것들은 동어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창작이나 문학 이론에서도 이 문제를 아주 중시합니다. 얼마 전, 수강생이 6.25를 소재로 소설을 쓰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역사에 길이 남고 싶으면 기존과 다른 시점과 거리를 택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같은 제재도 이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되고, 문학사는 그런 작품만을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객관성을 중시하는 학문에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시점과 거리를 이동하지 않으면 새로운 학설이나 원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가령 뉴톤의 '만유인력'만 해도 그렇습니다. 달은 달이라 떠있고, 사과는 사과라 떨어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사과=달> 이라는 식으로 바꿔 생각한 때문입니다. 사과=달>
종교를 비롯한 신념의 문제는 전적으로 시점과 거리에 의해 결정되지요. 유태교 장로들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의 아들을 자처하는 예수는 혹세무민하는 사람이고, 오늘의 가정주의자나 궁에 홀로 남아야 할 아내의 눈으로 보면 진리를 터득하겠다고 출가한 석가모니는 무책임한 방랑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론 자체를 소개하거나, 6.25를 소재로 삼아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쓰자고 제안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술·학문·종교 같은 비현실적인 영역에서는 획기적으로 이동할수록 새로운 세계를 여는 데 도움이 되지만, 정치를 비롯한 다중을 이끌어야 하는 현실의 문제에서는 그럴수록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므로 절충적·점진적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 사회의 좌우 대립만 해도 그렇습니다. 국제 합의를 무시하면서 계속 핵실험을 하고, 민족끼리는 물론 일반 상거래 관행조차 무시하면서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북은 마땅히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남한 국민 두 사람이 북한 주민 한 사람씩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 하는 통일경비 부담능력을 따져보면서 수위를 결정해야 합니다. 세계 경제 3위의 서독이 11위의 동독을 흡수하고도 아직 2차 대전 때 폭격 당한 동독지역 건물들을 철거하지 못하는 것은 경비 때문입니다.
반대로 서울광장을 막았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수사했다고 MB 정권을 '신 독재'라며 시국선언을 하거나 격투기 국회를 벌이는 쪽도 조금은 더 우로 옮겨와야 할 것입니다. 대다수 국민의 무의식에는 아직도 해마다 북한 주민 수십만 명이 굶어 죽는다는 유엔 통계와, 굶주림에 못 이겨 탈출하는 사람들을 코 꿰어 끌고 가는 정치보위부 사람들의 표정과, 스물 몇 살짜리 김정일 아들을 차기 지도자로 내세우려는 뻔뻔스러운 공작과, 58년 전 오늘 밤새도록 자박자박 진군하던 인민군 발자국 소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난 해, 서울대학교 평화통일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경제·정치·사회문화 3개 분야를 '0'은 왕래·회담이 이뤄지는 접촉교류 단계로, '10'은 실질적 통일이 완성되는 단계로 볼 경우 '남북통합 지수'는 2에서 3단계 사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므로 좌는 조금 더 우로, 우는 조금 더 좌로 끌어당겨 통일지수를 높이면서 준비하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러분들, 사랑해요. 이번 글을 끝으로 한 동안 못 뵐 것 같네요. 안녕, 안녕 다시 뵐 때까지 안녕!
尹石山 시인·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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