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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상 50년-책, 미래와의 대화] <3> 무엇을 먹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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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상 50년-책, 미래와의 대화] <3> 무엇을 먹을 것인가

입력
2009.06.24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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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을 것인가.

인류 역사에서 이 문제는 거의 모든 시대, 거의 모든 인간 개체에 가장 급박한 문제였다. 수십만 년 동안 절대다수의 인간은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데 인생의 대부분 시간을 써 왔다. 그럼에도 먹을거리는 늘 부족했다. 인류가 이 절대적 고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은 산업혁명과 농업혁명, 녹색혁명이 숨가쁘게 이어진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현재는 세계 인구의 약 22%(총 노동인구의 절반)가 농업에 종사하는데, 이들은 120억 명이 먹고도 남을 양의 먹을거리를 매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여전히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이 원초적 질문은 이제 정치와 경제의 갈등구조, 윤리학과 생태학의 논점을 휘감은 채 지구를 압박하고 있다. 인류의 해법은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의 창시자인 카를로 페트리니의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 (원제 'Slow Food Nation'ㆍ이후 발행)을 통해 먹을거리에 대한 21세기 담론 지형을 살펴본다.

"'먹는다'는 것은 정치ㆍ사회적 행위"

먹을거리의 위기와 관련한 국내의 위기감은 아직 개별 식품의 안전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선진국의 위기의식은 훨씬 폭이 넓다. ▦무분별한 개간과 기업형 영농으로 인한 사막화와 수자원 고갈 ▦화학비료 사용에 따른 토양 스트레스 ▦세계화한 거대 곡물기업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상 등이 포괄된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인식되는 현상은 현 식량 수급 시스템이 생물 다양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며,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카를로 페트리니(60)는 본래 이탈리아의 칼럼니스트이다. 1980년대 중반 로마에 맥도날드 매장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데 앞장서 유명해졌다. 그는 1980년대 후반 국제슬로푸드협회를 만들고 '테라 마드레' '살로네 델 구스토' 등 슬로푸드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2004년 미국 타임지에 의해 '유럽의 영웅'으로 선정됐다. 지난해에는 영국 가디언지는 그를 '지구를 구할 50인의 영웅' 중 하나로 선정했다.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 은 페트리니의 칼럼 가운데 빼어난 것을 골라 엮은 것으로, '음식을 먹고 맛을 느낀다'는 행위에 담긴 엄혹한 진실을 일깨우는 책이다.

책을 번역한 김종덕 경남대 심리사회학부 교수는 "농업 생산성이 향상됐다고 하지만, 지금도 65억 인구 중 10%가 넘는 8억여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지만 잉여 농산물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국내에 드문 것이 현실"이라며 글로벌 푸드 시스템에 비판적 자세를 가질 것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곡물 10kg을 들여야 쇠고기 1kg이 나온다"며 "고기를 적게 소비하고 굶는 사람들에게 농산물을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은 시장 논리가 아닌, 정치ㆍ사회적 당위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좋게(buono), 깨끗하게(pulito), 공정하게(e giusto)"

페트리니는 먹을거리에 대한 자신의 담론 체계를 '미식학(gastronomy)'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국내에서 미식학은 '식도락'의 이미지로 좁게 인식된다. 그러나 페트리니는 미식학을 "음식과 그것을 만드는 모든 자연적, 인공적 시스템에 대한 연구"로 정의한다. 따라서 먹을거리 생산 과정에서 빚어지는 국제자본과 제3세계 농민들의 갈등, 종 다양성을 파괴하는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저항 등도 미식학의 과제다. 그는 '미식'의 세 가지 특징을 ▦좋음 ▦깨끗함 ▦공정함으로 파악한다.

페트리니가 말하는 '좋음'의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는 "식품이 최대한 그 원래의 특징을 존중하는 어떤 자연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산업적 형태의 농업이 파생하는 인공적 가공을 배제하고, 원재료의 자연성을 살린 것을 좋은 음식으로 규정한다. 가축 사육 방식을 예로 들면 성장촉진제나 항생제가 섞인 고열량 사료, 혹은 스트레스가 없는 환경이 좋은 먹을거리의 전제다.

둘째는 "먹을거리를 통해 사람들이 시공간적ㆍ문화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을 지녀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엔 페트리니 특유의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 그는 맛을 느끼고 생각하는 '미식가적 감각 행위'를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페트리니는 이 감각 행위를 통해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식량 생산을 매개로 한 생태적 공동체 복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감각이 조잡하다는 것은 지배적인 모델에 대한 무비판적 굴복"이라는 것이 페트리니의 관점이다.

미식의 다른 특징인 '깨끗함'은 먹을거리의 지속가능성과 관련한 특징이다. 페트리니는 "배로 수입된 유기농 망고 한 박스와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진 빵"을 예로 들며, 토지에서 식탁으로 먹을거리가 이동하는 동안 발생하는 생태적 영향을 얘기한다. 마지막 특징 '공정함'은 생산자에 대한 정당한 대우, 지역의 풍습과 농촌의 삶에 대한 존중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로컬푸드, 공존을 위한 먹을거리 혁명"

슬로푸드와 함께 21세기 먹을거리 담론을 다룰 때 등장하는 대표적 키워드는 '로컬푸드'(local food)이다. 로컬푸드의 핵심은 음식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 곧 '푸드 마일리지' 개념이다. 이 거리는 지리적 거리뿐 아니라 사회적 거리까지 포괄한다.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라 할지라도,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여러 중간자가 개입하게 된다면 그것은 로컬푸드와 거리가 멀다. 김종덕 교수는 "(시간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개념인) 슬로푸드와 로컬푸드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며 "친환경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대안운동으로서 둘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로컬푸드는 특히 세계화의 폐해를 극복하는 대안 담론으로서 의미가 크다. 세계화 체제의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농촌으로 상징되는 전통적 공동체사회다. 따라서 이를 복원하는 로컬푸드 시스템, 예컨대 인접지 생산ㆍ소비에 기반한 도시농업(urban agriculture) 같은 시스템은 캐나다 등 선진국에서 '도덕적 경제'(moral economy)로 불리고 있다. 김 교수는 슬로프드와 로컬푸드를 추구하는 움직임을 "깨끗하고 건강할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마땅한' 것을 먹기 위한 식량권을 되찾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 '육식의 종말' '죽음의 밥상'

먹을거리 담론 중 가장 대중적인 화두는 '육식'이다. 육식 담론에는 다양한 차원의 문제의식이 얽혀있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가두어 키운 뒤 잔인하게 살해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문제, '굶주리는 인간을 외면한 채 막대한 농산물을 사료로 써야 하는가'라는 사회적 문제, '막대한 축산 폐기물과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허용해야 하는가'라는 환경적 문제 등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책 <육식의 종말> (시공사 발행)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현대 문명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저자가 육식 문제를 천착한 결과다. 리프킨은 육식이 대중화한 뒤 인류가 심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됐다고 파악한다. 단적인 예가 소다. 지구상에는 10억 마리가 넘는 소가 존재하는데, 이 소의 사육에 전 세계 토지의 24%가 쓰이며 곡물의 70%가 소비된다. 리프킨은 21세기의 지속을 위해서는 육식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동물 해방'을 추구하는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 (산책자 발행)은 평범한 세 가족의 먹을거리가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단란한 가족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서 사육된 닭, 태어나서 한 번도 우리 밖을 나가보지 못한 돼지, 고기를 사료로 먹은 소 등이다. 이 책은 건강이나 환경보다, 인간이 생존을 구실로 다른 생명에 가하는 폭력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학자 리처드 W 불리엣의 <사육과 육식> (알마 발행)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책이다. 불리엣은 인류 역사를 전기사육시대, 사육시대, 후기사육시대로 구분한다. 토템적 상징의 대상이던 동물은 사육시대를 거치며 인간의 이용 대상으로 전락하는데, 더 이상 쟁기를 끌 필요가 없어진 후기사육시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맥도날드의 재료'로 인식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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