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은 없었지만 '시골 무도회'는 있었다. 르누아르의 두 작품을 나는 한글도 떼기 전인 예닐곱 살 무렵 아버지가 선물한 '세계어린이명화'라는 책에서 보고 또 보았다. 글을 몰랐던 만큼 그림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냈다.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에서 그림의 맨 오른쪽에 앉아 뒤에 구부정하게 선 남자와 담소를 나누던 젊은 여인과, 그 여인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딴청을 부리는 맨 왼쪽의 밀짚모자의 남자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 그리고 그 둘로 추정되는 남녀가 춤을 추는 모습을 그린 '시골 무도회'. 같은 해(1883)에 완성된 다른 두 편의 무도회 그림에서도 같은 남녀가 등장한다.
그림책에서 보았던 그림들을 실물로 볼 때마다 나는 그림 앞을 잘 떠나지 못했다. 이번 '시골 무도회'에서도 그랬다. 글을 알게 되면서 잊혀진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기억해내려 애쓰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르누아르는 에콜 데 보자르(프랑스 국립 미술학교)의 같은 반에서 모네와 함께 그림 공부를 했다.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이라는 동명의 소설 속 구절을 인용하자면 둘은 물감을 살 돈도 모자란 가난한 청년들이었다. "모네처럼 물감을 덕지덕지 얹지는 말어." 르누아르에게 충고하는 화방 주인의 말이 재미있다.
'시골 무도회' 속의 여성은 뒤에 르누아르의 아내가 되는 알린느다. 여자를 안고 있는 남자의 시선과 허리를 감은 팔에서 남자가 얼마나 여자를 소중히 생각하는지 느껴진다.
열정과 춤 때문에 남자의 모자는 진작에 벗겨졌다. 그림 속에서처럼 르누아르는 사랑하는 여인과 춤을 추면서도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다. 알린느는 너무 젊고 아름다웠지만 자신은 나이 많고 가난한 화가에 불과했다.
같은 인상파 화가였지만 마네나 세잔과는 달리 가난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르누아르가 풍요로운 가정의 젊고 아름다운, 걱정 없어 보이는 여인들을 즐겨 화폭에 담았던 까닭이 쉽게 이해가 간다. 걱정 없이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는 것, 그 평화로움을 르누아르는 갈망했다.
그림 속에서 한 세계를 창조하려 했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그의 그림 하나하나는 곧 그의 생활이었다. 타이즈가 불편해 신기 싫다는 막내아들에게 우격다짐으로 광대 분장을 하게 해서 그린 '광대 복장을 한 코코'와,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모델이 되었던 유모 가브리엘의 여러 모습을 담은 그의 그림들은 삶과 하나가 되어 있다.
그는 다만 삶을 기록하고자 애썼다. 그러면서 자신까지도 창조된다고 믿었다. 삶이 묻어있기에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더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의 그림 앞에서 오래 서성이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행복은 찰나이다. 반짝 빛나는 햇빛과 가장 잘 어울리는 대상의 한 순간을 포착했던 그의 그림처럼. 르누아르전을 다녀온 뒤부터 나는 그의 그림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 울림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꿈에서도 가질 수 없는 능력,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네"라는 르누아르의 말과 그의 그림들이 지금 내가 고민하고 이야기를 쓰면서도 의심했던 것들에 대해 확신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은 우리 속의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행여 남성들이 그 말에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이다. 르누아르가 그의 화폭 속에 무수한 여성들을 담으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남성의 시선 속에 포착된 여성이 아니라, 아담에게서 이브가 가져갔던 그 여성성이다.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구이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르누아르의 그림들이 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하성란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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