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독일에서 출생한 헨리 키신저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학부에서는 회계학을 공부했지만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1954년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A World Restored: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 of Peaceㆍ1812-22)은 나폴레옹 몰락 후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와 영국 외무상 캐슬레이가 주도한 빈 체제의 성립과정을 다룬 것이다. 혁명적 세력을 상대로 한 유화정책의 실패를 지적한 이 논문은 냉전시절 미국의 대소정책과 관련해 큰 주목을 받았다.
▦ 1968년 닉슨 대통령에 의해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에 발탁된 키신저는 미소 전략무기 감축협정과 데탕트, 미중 수교 등에서 익히 아는 대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1977년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공직을 맡지 않았지만 국제정치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현실주의 기조에 바탕한 국제정치학자로서도 권위가 막강하다. 연초에는 86세의 고령임에도 미국의 원로 정치인들을 이끌고 러시아를 방문, 오바마 행정부의 대러 정책 조율에 일조했다. 그의 경륜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외교경험이 일천한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큰 행운이다.
▦그런 키신저가 5월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기 직전 미 폭스 뉴스와의 회견에서 "북한과 같은 나라를 다루지 못하면서 국제체제를 운위할 수 있느냐"고 일갈했다. 탐낼 만한 천연자원도 없고, 무역도 빈약하고, 오직 이웃나라의 지원에 의해 연명하는 나라 하나를 다루지 못한다면 국제체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북한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은 군사력과 경제력 면에서 세계 최고 순위를 자랑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국가인 북한에게 쩔쩔매는 것을 현실주의 노 국제정치학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였는지 키신저는 최근 워싱턴포스트 기고를 통해 자신의 처방을 밝혔다. 핵심은 중국의 역할 강조다. 단순히 중국더러 북한에 압력을 더 넣으라는 압박 대신 섬세하고 사려 깊은 대화를 하라는 주문이다. 중국의 이해관계와 우려를 감안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얘긴데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미국 조야에서 키신저를 중국에 특사로 보내자는 견해가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 문제를 미중이, 나아가 일본과 러시아가 참여한 4강이 풀어가면 한국의 설 자리가 없어질 우려가 크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앞뒤 못 재고 5자회담만 외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어서 더욱 걱정스럽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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