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중반기인 2006년 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신년 TV연설에서 양극화ㆍ고령화 등 우리사회가 처한 당면과제를 제기하며 이를 해소할 재원확충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연히 세원 확대든, 세율 인상이든 증세가 해답의 중심이었지만 그는 당장 그것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 역시 "증세를 얘기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원 조달이나 지출 축소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라며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사안인 만큼 어떤 방안이 최선인지 공론화하자는 주문"이라고 비켜갔다.
양극화ㆍ고령화 등 재정수요 산적
요령부득의 설명으로 문제의 핵심을 피해간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미래 대비를 위한 증세의 필요성과 시급성이 인정된다 해도 가뜩이나 인기 없고 취약한 정권이 공개적으로 증세를 언급하면 한나라당 등 반대세력이 최고의 먹잇감으로 삼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매사 공격적이고 직설적이던 노 전 대통령조차 공론화, 사회적 논의를 요청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참여정부 시절의 저성장이 과다 세금과 과잉 복지 탓이라고 몰아붙인 보수진영이 대선에서 감세와 규제완화를 두 축으로 한 경제살리기 슬로건으로 집권한 것을 보면 세금엔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짙게 배어 있다. 때마침 불어 닥친 글로벌 경제위기는 투자 활성화와 소비 진작을 앞세운 현 정부의 감세 드라이브에 날개를 달아줬다.
이를 주도한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법인세수가 최근 2~3년간 급증해 내용을 살펴봤더니 기업의 원본(이익)을 갉아먹을 정도로 세금을 많이 냈더라. 이는 곧 경제를 하지 말자는 얘기"라며 감세를 하지 않으면 당장 경제가 결딴날 것처럼 관련 입법을 진두지휘했다.
그 결과 지난해보다 올해 11조6,000억원, 내년엔 13조2,000억원의 세수가 줄게 된다. 세금 덜 내는 것을 싫어할 계층이 없고 경기회복 판단도 오락가락하니 이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올해 추가경정예산까지 포함해 35조원의 적자국채를 발행하는 등 국가채무는 1년 새 60조원이나 늘어난 366조원에 달하게 된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30.1%에서 35.6%로 급등하는데, 그나마 이 수치도 157조원으로 예상한 올해 국세수입이 경기회복 지연으로 차질을 빚으면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국가채무비율이 G20(선진 7개국과 신흥공업국 모임)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어서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며, 내년부터 본격적인 경기회복세가 시작되면 개선될 것이라고 강변하지만 감세효과를 부풀리던 정부와 여당 내부에서 돌연 증세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다. 재정 건전성에 심각한 적신호가 켜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권이 세제의 몸통을 함부로 건드릴 처지도 아니다. 감세만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나팔을 불어댄 것도 있고, 세제 합리화ㆍ정상화라는 이름으로 부자감세를 밀어붙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목 신설이나 세율 인상 등의 증세안은 엄두도 못 내고 고작 만지작거리는 게 비과세ㆍ감면 축소라는 낡고 식상한 메뉴다.
이 규모가 25조원에 달한다니 10~20%만 줄여도 큰 액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칠게 말하면 부자들에게 깎아준 돈을 취약계층과 영세기업에게서 더 거둬 메운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최근 한나라당 일각에서 비과세ㆍ감면 축소를 반대하며 법인세 소득세 종부세 양도세 등을 망라한 정부의 부자감세 정책에 제동을 건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감세의 투자ㆍ소비 효과는 입증되지 않은 채 자산계급과 일부 대기업의 주머니만 불려 소득 격차와 사회적 위화감만 더욱 키워 지지층 이탈을 부추긴다는 판단일 것이다. 이런 정치적 계산이 아니더라도 지속 가능한 국가미래를 생각하면 증세는 모두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국가채무 급증 불구, 증세 딜레마
그런데 정작 자산계층부터 달콤한 감세의 입맛에 길들여졌으니, 어디서부터 그 작업을 시작할지 참으로 답답하다. 불황과 공황을 통해 자본의 확대 재생산구조는 복원되지만 근로계층의 궁핍화는 가속화한다는 좌파 경제학의 예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유식 칼럼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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