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은 긴 세월이다. 기쁨과 환호, 슬픔과 비탄을 눅일 만한 세월이다. 그것은 또 세상에 알려졌던 한 이름을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는 세월이다. 특히 생애 첫 번째 20년에 다다른 세대에게, 그 이름은 처음부터 아예 입력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1980년 스무 살에 이른 세대 다수에게, 김주열이라는 이름은 설었을 것이다. 2000년 스무 살에 이른 세대 다수에게, 윤상원이라는 이름은 설었을 것이다. 2009년 스무 살에 이른 세대에게, 임수경이라는 이름은 어떨까?
물론 공동체의 기억 공간 속에서, 임수경의 처지는 김주열이나 윤상원보다 다소 낫다. 김주열은 죽음으로써 1960년 4월혁명의 불을 댕겼고, 윤상원 역시 죽음으로써 1980년 5월항쟁을 마무리했으나, 임수경(41)은 여전히 건재해 1989년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청축)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스무 살에 다다른 세대 가운데 '청축'이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청축은 반제 자주, 반전 평화의 기치 아래 주로 사회주의 나라 청년ㆍ학생들이 모여 열었던 행사다. 1945년 10월 런던에서 결성된 세계민주청년연맹이 이듬해 파리 이사회에서 창설을 결정한 이 축전은 1947년 7월 프라하에서 처음 열렸다.
1989년 7월에 열린 평양 청축은 열세 번째 행사였다. 그것은 그 전 해 서울에서 열린 하계올림픽에 맞서 평양 당국이 부랴부랴 조직한 대항행사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4학년생이었던 임수경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대표해 이 행사에 참가했다.
임수경은 그 해 6월 30일 평양에 도착해서 46일 뒤인 8월 15일 남으로 귀환했다. 가는 길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그녀는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해서, 일본과 독일을 거쳐 열흘 만에야 평양에 닿았다. 오는 길은 순식간이었다.
8월 15일 광복절, 그녀는 공동경비구역(JSA)의 높이 7cm, 너비 40cm의 시멘트 경계를 가볍게 건너 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안기부(지금의 국정원)로 끌려가 구속되었다.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민간인은 임수경이 처음이었다. 임수경이 혼자 내려온 것은 아니다. 도드라지게 당차 보였으나 어쩔 수 없이 여린 21세 여성이기도 했던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문규현 신부를 북으로 보냈고(그는 7월 25일 평양에 도착했다), 문 신부는 임수경의 손을 잡고 함께 분단의 벽을 넘었다.
임수경의 방북과 귀환은 국가보안법의 거의 모든 조항을 위반한 것이었다. 그녀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구형받은 뒤 10년의 선고를 받았고, 항소심에선 형량이 5년으로 줄었다.
문규현 신부는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선 5년을 선고받았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92년 성탄절 전야에 두 사람은 함께 가석방되었고,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역시 함께 사면복권되었다.
오늘날의 스무 살 청년이 1989년의 한국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두 해 전의 6월시민항쟁으로 기지개를 켠 정치적 민주화는 일부 운동권세력에게 좀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의 전망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도 '조국통일촉진운동'에 강한 운동량을 실어주었다.
소위 북방외교가 노태우 정부 대외정책의 기조로 설정된 것도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주의자들을 격려했다.(한국은 그 해 2월 '공산국가' 헝가리와 수교했다.)
성급한 이들에게 통일은 그리 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실상 임수경이 그 해에 평양을 방문한 유일한 남쪽 민간인은 아니었다. 그 해 3월 20일 소설가 황석영이 평양에 들어갔고, 닷새 뒤에는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과 포옹했다.
남쪽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뿌리깊은 반북 감정에다 정권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매스미디어의 편향 보도로 방북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졌고, 그것은 노태우 정부로 하여금 소위 '공안정국'을 조성해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도록 만들었다.
당초 평양 축전을 교류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며 남북학생교류추진위원회까지 만들었던 노태우 정부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참가를 불허한다고 못박았다. 임수경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바로 이런 정세 아래에서였다.
임수경은 그 해 평양축전의 헤로인이었다. 여느 때라면 뉴스가치가 크지 않았을 청축은 임수경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국제 언론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북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임수경에게 열광했고,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북녘 곳곳에 울려 퍼졌다. 뒷날 관측자들이 지적했듯, 임수경의 존재는 또 북한 당국에게 달갑지만은 않은 효과를 낳기도 했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나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이 여성은, 북한 사람들이 생각했던, '파쇼와 미제국주의에 신음하는 남녘 대학생'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한으로 돌아간 뒤 들려온 임수경의 소식도 그랬을 것이다.
북한에서라면 한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릴 중형을 받았을 사람이 '고작'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그것도 3년이 조금 지나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것은 임수경이 아무리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정치범이라 할지라도, 북한에서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위 '임수경 방북 사건'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판문점을 통한 그녀의 귀환이다. 그녀는 이미 평양 도착 성명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겠다"고 선언해 놓은 참이었다. 그녀는 당초 정전협정 기념일인 7월 27일에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한국 정부의 동의가 없는 한 판문점 통과를 허용할 수 없다는 유엔사령부의 입장에 따라 귀환이 무산되었다.
임수경의 신변 안전에 확신이 없었던 북한 당국도 제3국을 통한 귀환을 권유했다. 그러나 자신의 '판문점' 발언에 그녀가 제 전 실존을 실었음이 점점 명백해졌다. 그녀는 제3국을 통해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뜻을 북한 당국에 내비쳤고, 북한 당국도 이 고집센 남녘 처녀를 통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제3국을 통해 귀환했다면, 그녀의 방북 의의는 한결 줄었을 것이다. 그녀가 금을 내고 싶었던 것은 판문점으로 상징되는 남북의 분단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식투쟁에 돌입했고, 100여 명의 청축 참가자들이 동조 단식을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판문점에서 매일 반미 시위를 조직했다. 7월 27일 못지않게 상징적인 8월 15일, 그녀가 '무단'으로 분단의 벽을 넘어 남으로 돌아오는 순간, 국내외 미디어는 긴장 속에서 판문점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스펙터클이었다. 거대한 스펙터클이었다. 나는 지금 여기서 스펙터클이라는 말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일종의 '보여주기'였을지라도, 임수경은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그 '보여주기'를 '연기(演技)'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전세계에 증언했다. 그녀는 지혜롭고 용감했다.
앞으로 20년이 더 지난 날 1989년 여름을 돌이켜본다면, 임수경의 방북과 귀환은 한국 민주주의 회복기의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 때까지도 통일이 되지 않는다면, 그 작은 에피소드와 그 에피소드의 주인공을 기억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임수경의 방북과 귀환은 길고 험난했던 통일운동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될 것이다.
'회의적 통일론자'로서, 나는 스물한 살 임수경의 모험에 썩 높은 값어치를 매기진 않는다. 나는 젊은 시절의 임수경 같은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통일이 지고의 가치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것의 최저치는 대한민국이 이웃 동족국가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한 집에 살며 아옹다옹 싸우는 가족보다는, 옆집에서 따로 살며 사이좋게 지내는 가족이 훨씬 보기 좋다. 통일과 평화가 조금이라도 맞바꿈 관계에 있는 한, 나는 망설임 없이 통일을 버리고 평화를 취한다.
그러나 스물한 살 임수경의 모험은 매혹적이었다. 그것은 한반도 전체를 무대로 삼은, 어쩌면 전세계를 무대로 삼은 걸작 퍼포먼스였다. 대본도 채 준비되지 않은 이 진솔하고 위험한 퍼포먼스를 임수경은 훌륭히 해냈다.
통일이 되든 안 되든, 임수경은 '통일의 꽃'이다. 스물한 살 임수경을 되돌아보면, 그 어여쁜 '통일의 꽃'을 떠올리다보면, 문득 마음이 울렁거린다.
그리고 젊은 임수경도 불렀을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청년들 굳게 잡은 손/ 영원히 놓지 않으리/ 단결의 노래 부르며/ 벗들아 함께 춤추자/ 친선 친선의 노래 우리 부르며/ 축전 축전의 이 밤 함께 춤추자"('세계청년학생축전가' 2절).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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