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1만원권이 처음 나온 시기는 1973년 6월이었다. 이전엔 정주영 전 현대회장의 조선 성공신화를 말할 때 빠지지 않았던,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권 지폐(1962년 첫 발행)가 최고액권이었으나, 경제개발 과정에서 화폐발행액이 급증하자 단번에 20배나 액면을 올린 것이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나는 사이 물가는 12배, 국민소득은 150배 이상 늘어났지만 1만원권은 최고액면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그나마 변화라면 앞면에 세종대왕 초상, 뒷면에 경복궁 근정전을 넣었던 도안 중 뒷면을 2007년 혼천의로 바꾼 것이 유일했다.
▦ 5만원권이 처음 발행ㆍ유통될 23일은 우리나라 화폐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액권 발행 논란을 거친 끝에 결국 10만원권은 없던 일이 되고, 5만원 신권이 우리 화폐의 대표로 등극하는 날이어서다. 미국과 일본이 70년대부터 우리 돈의 10만원에 해당하는 100달러 지폐와 1만엔권을 통용해온 것에 비춰 보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뇌물ㆍ비자금 등 음성적 거래 우려와 낭비ㆍ물가자극 염려 등으로 고액권 발행이 매번 유야무야됐던 점을 떠올리면 5만원권은 축복과 저주의 운명을 동시에 안고 태어나는 셈이다.
▦ 이런 논란 외에도 5만원권 탄생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앞면에 들어갈 초상인물을 선정하는 작업은 말 그대로 우여곡절이었다. 한국은행은 '화폐도안 자문위원회'까지 구성,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정치인ㆍ군인으로는 세종대왕, 애국지사는 김구, 과학자는 장영실, 여성은 신사임당, 학자는 정약용 등으로 압축했다. 이런 와중에 양성 평등 차원의 여성 선정론이 강하게 제기됐고 결국 '여성에 대한 차별과 한계를 극복하고 자녀를 훌륭히 키워냈으며 시ㆍ서ㆍ화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여류 예술가' 신사임당이 최고 점수를 얻었다.
▦ 한은이 올 2월 공개한 5만원권 도안에는 이종상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초상과 그녀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묵포도도'와 '초충도수병' 가운데 가지 그림이 포함됐고, 황색 위주의 견본 화폐도 얼마 전 공개됐다. 생애에 새 최고액권을 만나게 된 사람들은 우려보다 기대가 일단 큰 듯하다. 5만원권 시대에 달라질 의식과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다. 한은은 엊그제 홈페이지(www.bok.or.kr)에 5만원권 디자인과 주요 위조방지장치, 영상자료, 예상문답 등을 담은 안내방을 개설했다. 이제 5만원권 한 장만 가지면 하루가 든든할 텐데, 그럴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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