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중 지음/선인 발행ㆍ696쪽ㆍ3만8,000원
빨갱이.
인격 모독과 적대감을 담은 속어 가운데, 언론은 물론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허용돼 온 유일한 단어가 아마 '빨갱이'일 것이다. 남한 사회에서 빨갱이는 일차적인 사회악이며, 심지어 때려 죽여도 죄 될 것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였다. 이 책은 그 빨갱이, 혹은 빨갱이를 만든 세력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60여년 동안 남한의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녀왔는지를 분석한 연구 결과다.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저자의 결론은 간명하다. "빨갱이는 여순사건(1948)이라는 기념비적이고 유혈적인 사건을 통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남한의 기득권 세력은 반대 세력인 공산주의자를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비인간, 같은 하늘 아래 살지 못할 존재'로 만드는 데 여순사건을 이용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여순사건을 통해 전면적으로 등장한 국가폭력은 빨갱이를 없애기는커녕, 끊임없이 빨갱이를 만들어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연구의 첫번째 목적을 "공식 역사의 시선으로 은폐되고 누락되었던 여순사건의 사실적 측면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는 여순사건을 왜곡해온 정부와 "진실이 드러나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보수세력뿐 아니라, "진보진영이 보이는 불편함과 침묵" 역시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한다. '무계획적이고 때늦은 반란'이었다는 진보 진영의 관점은 이 사건의 정치ㆍ사회적 성격과 우발성을 복합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라는 시각이다.
저자는 여순사건의 전말을 짚으며 "대한민국 국민의 폭력의 세례 속에서 탄생됐다. 이승만 정부의 국민 형성 방식은 '적'과 '아'를 극명하게 구별하고 상대방의 전멸을 시도한 전장의 논리에 기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폭력성이 한국전쟁 직후의 대학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사태로 재발됐다고 진단한다. '반공국가의 탄생'의 이면엔 '폭력의 용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폭력과 학살로 얼룩진 역사를 기록하며, 저자는 해원의 바람을 담는다. "연구 과정에서 많은 직업을 경험하게 했지만, 내가 이 책에서 되고 싶었던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무당이었다… 이제 말하지 못하는 여순사건을 넘어서 말할 수 있는 여순사건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미약하나마 그 디딤돌이 되고자 한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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