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별세한 조세형 민주당 상임고문은 굴곡 많은 한국 정치사에 굵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그의 인생역정은 좌우명인 화이부동(和而不同ㆍ남과 사이 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 않는다.)으로 요약된다.
유신 시절 언론 독립을 위해 투옥도 불사한 곧은 언론인이었고, 정치에서는 다른 정당이나 정파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소통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치열하고 성실한 언론인이었다. 현직 기자 시절이던 1957년 주도적으로 창립한 관훈클럽은 지금 회원 수가 900여명에 달하는 중견 언론인들의 연구모임으로 발전했다. 특히 전화로 기사를 부르던 한국일보 초대 워싱턴 특파원 시절에는 받아쓴 후배 기자에게 다시 그 기사를 읽도록 할 정도로 자신의 글에 철저했다.
조 상임고문의 정치 입문은 화려했다. 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1978년, 이철승 당시 신민당 대표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울 성북에 출마, 10대 총선의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된 것. 그러나 80년대 전두환 군부 정권에서는 정치규제에 묶이기도 했다.
87년 대선에서 김대중(DJ) 평민당 후보의 선거부위원장으로 활약한 뒤 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성동을에 출마, 당시 이세기 민정당 의원을 물리치고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14대에 내리 당선됐고 15대 총선에서는 낙마했으나 광명을 재보선(98년)에서 한나라당 전재희 후보를 누르고 4선에 올랐다.
조 상임고문은 13대 이후 DJ와 함께 했고 96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을 맡아 97년 대선에서는 DJP(김대중_김종필) 연합 출범에 기여, 한국 정치사상 첫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끌어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조 상임고문은 이른바 동교동 가신그룹에 들지 않았고 그것은 때때로 DJ와 맞서는 것도 불사한 합리성과 비판성 때문이었다.
그런 그도 DJ 집권 후인 99년 4월 '세풍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된 한나라당 서상목 의원의 체포동의안 부결 책임을 지고 권한대행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DJ에 의해 2001년 12월 주일대사로 발탁됐고,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까지 3년간 동북아 외교 현장에서 맹활약했다. 이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상임고문으로서 최근까지 현실정치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조 상임고문은 언론인 출신답게 정치인 시절 TV 정치토론의 단골손님이었다. 특유의 정연한 논리와 언변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은 동료 정치인들의 기억에도 오롯이 남아있다.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은 "이 나라 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논리와 몸으로 실천하신 분"이라며 "그 분의 여유와 웃음, 위트와 유머를 다시 보고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고 말했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은 "민주당은 조 상임고문께서 평생 일구고자 했던 언론발전, 정치발전의 뜻을 받들어 노력해 나가겠다"며 명복을 빌었다.
김회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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