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취재일로 우즈베키스탄에 갔다. 타시켄트의 특급호텔에 체크인을 하자 손가락만한 종이쪽지를 한 장씩 줬다. 'OO호텔에 숙박하고 있다'는 내용이 전부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니 그걸 잃어버리면 감옥에 갈 수 있다고 가이드가 경고했다. 길거리에서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는데, 숙소가 불명확하면 그대로 끌려간다고 했다.
카리모프 대통령의 철권통치를 실감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를 존경한다고 했는데 당시 분위기는 박정희 시대 이상이었다. 역사박물관을 갔더니 가장 큰 방에 카리모프의 거대한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
올 5월에 이명박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는데, 여전히 카리모프는 대통령이다. 그의 가족들이 우즈베키스탄 내 알짜 기업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나 그가 종신대통령을 꿈꾼다는 기사는 외신으로 들었다.
9년 전 기억이 떠오른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6.15남북공동선언 기념연설에서 정부를 비판한 데 대해서 한나라당의 중진들이 '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독재자라고 비판하지 않으면서 이명박 정부를 독재라고 비난하느냐'고 했기 때문이다.
외교 상대, 독재비판 힘들어
이명박 대통령은 카리모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판했던가. 비판하기는커녕 정상회담에서 카리모프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 적는 사진까지 찍어주었다. 정상회담 사진은 양국의 국력이 아무리 차이가 나도 정상이 대등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관례이다. 심지어 어느 대통령은 의자에 푹 묻혀앉았는데, 다른 대통령은 등을 앞으로 내밀고 공손하게 앉았으면 그 사진을 배포한 것이 의전상 실례니 아니니 논쟁이 일기도 할 정도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온 카리모프 대통령에게 우상의 고국에서 온 현직 대통령이 이렇게 공손한 모습을 보인 사진은 아주 효과적인 홍보물이겠지만 국제적인 시선을 의식한다면 지나쳐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한테는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았는가.
그걸 묻는다면 코미디일 것이다. 외교관계가 있는 사이에서 상대방의 정치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힘들다. 우즈베키스탄의 천연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독재를 언급하지 못하듯, 북한을 설득해서 개방체제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믿는 전직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북한에게도 예의를 갖춰서 대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이 세습독재국가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핵무기 개발에 열 올리면서 백성들은 배를 곯리는 나쁜 정치가들이 이끌어간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북한을 6자회담으로 끌어내고, 핵개발을 포기시키고, 북한의 개방체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당국자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정치가들에게 말은 조심스러운 게 당연하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비난해주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북한은 여전히 '남한을 전복하려는 반국가단체'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내부적으로는 이미 박정희 시대에 북한과 정상회담을 시도하면서, 국제적으로는 1991년 유엔에 동시 가입하면서 서로의 국체를 인정했다.
북한도 냉철외교 필요한 제3국
인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북한을 어떻게 민주적인 국가로 이끌 것인가는 분명 누구도 놓쳐서는 안되는 과제이다. 어떤 이들은 빨리 독재정권을 고사시켜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개방을 통해 경제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쪽 방식이 옳은지는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북한 역시 우즈베키스탄과 똑같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독립국가라는 점이다. 개성 문제도 급격한 인상안을 제시받았더라도 제3국과의 경협과 같은 기준에서 경제성이 있으면 받아줄 수 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공동으로 북한을 제재하는 데 동의한 것이 대단한 성과여서는 안된다. 미국과 협조하여 북한을 적으로 돌리면 미국의 무기는 많이 사들이면서도 한반도의 긴장은 높아질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북한은 꾸짖고 가르쳐야 할 반국가단체가 아니라 외교를 잘해야 하는 이웃의 독립국가라는 인식을 가질 때 북한 정책은 보다 정교해질 것이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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