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밤 우리 아파트는 에너지의 날 행사에 동참해 5분간 소등을 했다. 불을 끄고 별을 헤는 밤. 하나 둘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 잠겨가는 건너편 아파트를 아이들과 바라보다 여전히 불 켜진 창을 향해 나도 모르게 "불 꺼"라고 소리치고 말았다. 지금은 없어진 등화관제 훈련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온동네가 어둠에 잠겼다. 골목에서는 민방위대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불 켜진 집들을 향해 반말로 "불 꺼!" 외쳐댔다.
그런 날 잠자코 있을 동생이 아니었다. 그애의 성화에 일어나기는 했지만 다시 옷을 챙겨 입으려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애는 꾀를 잘 냈다. 이렇게 캄캄한데 옷은 뭐하러 입느냐는 거였다. 문 밖으로 한 발 내딛기가 어려웠지 어느새 나는 동네 개구쟁이들을 따라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룩덜룩한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동네 청년의 희디흰 이였다. 그가 웃은 건 속옷 차림으로 나온 내 모습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어둠이 모든 것을 감춰줄 거라고 믿었다. 흰 옷을 더욱 희게 하기 위해 형광증백제라는 것을 사용했을 때니 내가 위아래로 입은 백양표 러닝과 속바지는 하얗다 못해 파랗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열일곱 고2, 말만한 처녀가 그러고 나와 골목을 뛰어다니고 있었으니 동네 개도 웃을 일이었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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