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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영어마을 썰렁 '오 마이 갓'/ 개장 3년 만에 존폐 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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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영어마을 썰렁 '오 마이 갓'/ 개장 3년 만에 존폐 위기에

입력
2009.06.17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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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경기 파주시 탄현면의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 마을 입구에 있는 매표소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고, 넓은 주차장에도 대형 버스 4대만 서 있었다. 입장권을 끊고 마을에 들어서자 영어마을 중심지인 시티홀(시청)까지 이어지는 주 도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주 도로는 양쪽으로 각종 영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건물은 물론, 음식점 편의점 등이 밀집해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하지만 20명 가량의 단체 관람객 너 댓 모둠이 이리저리 몰려다닐 뿐 한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편의점 앞에선 경남의 한 중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온 여중생 10여명이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캠프 안에서 모든 대화는 영어로만 한다'는 취지가 무색하게 영어는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왜 더 둘러보지 않고 앉아만 있느냐'고 묻자, 학생들은 "30분 정도 둘러보고 나니 더 볼 것도, 할 것도 없어서 우리끼리 수다나 떨고 있다"고 대답했다.

박물관 앞에선 여중생 서너 명이 지나는 원어민 교사에게 "하이(Hi)!" 하며 말을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원어민 교사는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대꾸 없이 지나쳤다. 이들에게 '영어 대화는 많이 나눠 봤냐'고 묻자 코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영어요? 방금 'Hi' 한마디 한 게 전부인데요. 차라리 놀이공원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게 훨씬 재미있고 유익할 것 같아요."

지난달 20일 찾은 영어마을 내 기숙사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단기 입소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위한 기숙사 10개 동이 마련돼 있지만, 이날은 2개 동만 사용 중이었다. 그나마도 이용자는 연수 온 공무원들이었다. 한 공무원은 "영어마을 참가가 교육 점수에 들어가기 때문에 왔을 뿐 영어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영어마을의 '원조'로, 전국적으로 영어마을 붐을 일으킨 파주 영어마을이 존폐의 기로에 섰다. 입장객 수는 매년 급감하고 있고, 불어나는 재정 적자로 영어마을의 질을 좌우하는 원어민 강사 수를 줄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급기야 성인 전문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어서 당초 설립 취지마저 흔들리고 있다.

경기도가 2006년 4월 탄현면 27만7,000여㎡에 990억원을 들여 건립한 파주 영어마을은 시설 규모와 학습 프로그램 구성, 교사 인력 수급 면에서 전국 최대, 최고를 자랑했다.

경기도는 "굳이 해외로 유학을 가지 않더라도 영어마을에서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생활 회화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다"면서 "학부모들의 등을 휘게 하는 영어 사교육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장담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해외 영어캠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저렴한 비용으로 '살아있는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신청자들이 몰려 개장 초 입소 경쟁률이 수 십 대 1까지 치솟았고, 월 평균 입장객이 5만7,000여명에 달했다.

이후 영어마을은 유행처럼 번졌다. 같은 해 지방선거에서 후보들마다 영어마을 설립을 공약했고, 실제 전국적으로 20여 군데의 영어마을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지나친 재정 적자가 영어마을의 발목을 잡았다. 애당초 지방 재정을 투자, 과도한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는 취지였지만 김문수 지사가 취임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김 지사는 "교육청이 할 일에 도가 매년 수 백억원을 쏟아 부을 이유가 없다"며 경영합리화를 지시했다.

이후 원어민과 프로그램 수를 줄이면서 부작용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영어마을'이란 이름과 달리 수업 시간에만 영어가 쓰이고, 그나마도 교사 1인 당 학생 수가 10여명에 달해 사설 영어학원과 별반 다를 게 없다.

2006년 9개월 동안 51만3,881명이던 입장객은 이듬해 32만3,480명, 2008년 24만5,011명으로 급감했다. 올해는 4월까지 3만6,112명에 불과해 사실상 명맥만 이어가는 상태로 전락했다. 2박3일~4박5일 등 단기 입소 프로그램 참가자도 2007년 3만3,209명, 2008년 2만7,545명으로 줄었고, 올해는 4월까지 6,539명 뿐이다.

그러나 흑자 전환은 요원한 실정이다. 2006년 192억원이던 적자가 김 지사 취임 이후 2007년 66억원으로 줄었지만, 지난해에도 여전히 41억원을 기록했다. 그나마 공무원들을 대거 유치한 결과로, 영어마을의 본래 취지는 실종된 지 오래다.

한 교육공무원 입소자는 "숙소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세면실에 비누도 없는 등 관리가 엉망인데다 수업 시간에만 영어를 쓰는데 누가 자녀를 이런 곳에 보내겠냐"면서 "원래 영어마을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면 껍데기 뿐인 교육기관으로 남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영어마을 관계자는 "재정 적자의 상당 부분을 해소한 만큼 이제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영어마을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겠다"면서 "영어권 관광객을 유치해 교육생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게 하는 등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주형 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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