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전 대구 중구 동산병원 내 동산선교박물관 앞. 10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미술학원에서 단체로 온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30여명을 빼면 대부분 가족 단위였다. 다들 간편한 옷차림이었는데, 특히 운동화나 굽 낮은 단화 등 편한 신발을 신은 것이 눈에 띄었다. '대구 근대문화골목 탐방'에 나선 이들이다.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1901∼1986)이 작곡한 '동무생각'이란 노래 아시죠.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여기 등장하는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 청라언덕이 바로 푸른 담쟁이로 뒤덮인 동산선교박물관 일대를 가리킵니다."
19세기 말 선교사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선교박물관을 둘러보던 탐방객들은 해설을 거들던 계명대 동산의료원 이명수 홍보실장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도심의 이 골목 저 골목에 숨어있는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골목 탐방의 묘미다.
숨은 이야기 찾기는 바로 옆 의료박물관에서도 이어졌다. '상아청진기'와 눈물샘을 뚫어주는 '금바늘', 1920년 만들어진 습도계 등 희귀 의료 기기들이 가득한 이 박물관 앞은 대구에서 3ㆍ1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경남 창원에서 온 이동호(35), 임희정(37)씨 부부는 "인터넷에서 문화유산 등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장소를 찾다 골목 탐방에 눈길이 머물렀다"며 "숨은 얘기를 들으며 카메라에 그 장소를 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공동화 현상으로 죽어가던 대구 도심 골목에 옛 자취를 더듬는 탐방객들이 몰리고 있다. 대구 중구가 3월부터 매달 둘째, 넷째 주 토요일과 셋째 주 목요일 오전에 운영하는 골목 탐방에 전국에서 벌써 670여명이 다녀갔다. 지난 11일에는 골목 탐방을 벤치마킹 하려는 울산 중구 의원 16명이 요청해 별도의 탐방이 이뤄지기도 했다.
골목 탐방에는 보통 한 번에 20여명이 참여하는데 13일에는 50여명이 몰려 두 팀으로 나눠 진행됐다. 골목문화해설사 이영숙(45ㆍ여)씨가 미술학원생들을 데리고 떠난 뒤, 또 다른 해설사 김영옥(46ㆍ여)씨가 남은 탐방객들을 계단 길로 이끌었다.
"청라언덕을 내려가는 90개의 돌계단은 대구의 '걷고 싶은 길' 중 하나이며, 인근에 살았던 소설가 빙허 현진건(1900∼1943)이 자주 다녔다고 해서 '현진건 길'로도 불립니다."
이어 탐방객들은 영남 최초 고딕양식 건축인 계산성당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1901∼1943) 고택,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1850∼1913) 고택, 3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약전골목, 400m 길이의 '진(긴) 골목'을 거쳐 화교소학교를 방문하는 것으로 2시간에 걸친 골목 투어를 마쳤다.
탐방객들은 따가운 지적도 했다. 부인과 함께 세 살 배기 아들을 안고 골목을 누빈 기성호(34)씨는 "동산박물관과 계산성당은 100년 넘은 건물인데도 세련되고 멋있었지만 이상화 고택은 최근 복원한 건물이라 인위적 냄새가 많이 풍겨 아쉬웠다"고 말했다.
대구 토박이 장후경(57ㆍ여)씨도 "외국인이 이런(새로 지은) 건물을 어떻게 평가할 지 걱정된다"고 했다. 해설사 김영옥씨는 "어릴 때 복원되기 전의 이상화 고택을 보며 자랐는데, 복원을 아무리 잘해도 옛 느낌이 살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골목 탐방은 2개 코스로, 다른 하나는 경상감영공원에서 향촌동, 대구역, 종로초, 섬유회관, 오토바이골목, 삼성상회, 달성공원을 도는 일명 '달구벌 그 때 그 시절' 코스다.
이 코스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이곳을 누볐던 박목월, 유치환, 조지훈, 김팔봉, 마해송, 박두진 등 시인들의 아지트 백조다방과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화월여관 등을 만날 수 있다. 중구는 곧 남성로∼동성로∼교동귀금속거리∼서문시장과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봉산문화거리∼대구향교∼건들바위 등 코스도 개발할 예정이다.
골목에 대한 관심은 수년 전 민간에서 시작됐다. 거리문화시민연대가 2002년 10월부터 대구 도심 골목길을 탐방, '골목은 살아있다'는 책 5,000권을 펴냈다. 그러다 시민연대의 활동이 뜸해지면서 중구가 나서게 된 것. 2, 3월 8주간의 교육을 거쳐 도시문화탐방 해설사 21명이 배출됐다.
전직 교사나 예술인이 대부분인데, 골목의 역사 외에 화술과 표정 짓기까지 훈련한 뒤 실전에 배치됐다. 중구는 또 골목에 얽힌 이야기 발굴을 위해 어르신들의 증언을 듣고 전문기관에 연구용역을 맡기기도 했다.
문화운동가 출신인 윤순영 대구중구청장은 "도심 곳곳에 실핏줄처럼 퍼져있는 1,000여개의 골목을 생생한 이야기로 연결해 제주의 '올레'를 뛰어넘는 문화상품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골목탐방에 참여하려면 중구청 홈페이지(gu.jung.daegu.kr)나 전화(053-661-2194)로 신청하면 된다.
글·사진 대구=전준호 기자 jh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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