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의 자살이 촉발한 정국의 혼미가 계속되고 있다. 소위 좌우 대립이 대학사회 마저 분열시키고 있다. 과연 이런 혼미와 분열이 진정 의미 있는 것인지, 사태의 근본을 돌아볼 때이다.
정치인의 자살은 자신의 공적 행위에 대한 강렬한 책임감의 표현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심판을 당대의 법정이 아닌 역사의 법정에 맡기려는 결단의 행동일 수도 있다.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행위는 분명히 하나의 결단이다.
시대착오적 '독재ㆍ반민주' 공세
그러나 공인의 경우 그것이 어떠한 성격의 결단인지, 최후의 행위로서 정당성이나 책임감 또는 역사의식이 표현되어 있는지를 엄중하게 심판되어야 한다. 모든 죽음은 안타까울 수 있지만, 공인의 죽음은 단순히 슬픔이나 애도의 대상만은 아닌 것이다.
그가 남긴 '삶과 죽음은 자연의 일부'라는 말은 죽음에 임하는 담담한 심경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유서에는 사법적 심판을 받게 될 상황에 대한 진지한 해명이나 책임감을 피력한 흔적이 없다. 자신의 삶의 정점이었던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역사적 성찰의 편린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천명했던 정치적 신념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기술도 발견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토록 위한다고 했던 삶에 지친 서민들에 대한 따뜻한 위무의 말도 없이 오직 자신의 지친 삶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언어가 있을 뿐이다. 왜 그렇게 모진 행동을 해야만 했는지, 그 결단의 의미 자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감상적 언어가 있을 뿐이다. 그 것이 최고의 공직을 지낸 인물의 자살이 일반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안쓰러움을 남긴다.
죽음 자체는 무조건 억울하고 슬퍼해야 하고, 모든 허물을 가릴 수 있으며, 산 자는 무조건 죄인이라는 듯한 애도의 분위기가 정치적 제전이 되어 정치과정 전체를 파행시키고 있다. 그 제전 속에서 고인은 피의자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민주주의의 순교자'가 되고, 어제까지 그를 버렸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갑자기 참회의 고해성사를 하면서 그 죽음의 제전을 이끌고 있다.
그가 진정으로 이러한 사태의 반전을 기대하고 마지막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의 죽음에는 나름대로 진실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죽음의 제전에는 어떠한 진실성이 있는가.
현 정권이 보인 국정운영의 미숙함이나 실용이라는 이름의 속물주의 등은 비판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독재'나 '반민주' 등으로 공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설득력도 없는 작위적인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스스로 입안한 정책에 대한 소통과 설득을 확신을 가지고 일관되게 추구하지 못한 무능력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스스로 주도한 민주화 투쟁을 통해 확립된 근대 민주주의의 제도적 원칙들을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로 취사선택하여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소통과정을 처음부터 폭력적으로 봉쇄한 측은 민주주의적 소통 자체를 운위할 자격이 없다.
위선적 우상 숭배의 해악
국민장은 우리 국민의 그 깊은 정과 특유의 열정을 일깨웠다. 무능한 정부ㆍ여당은 그 소중한 국민적 에너지를 새로운 국정비전의 제시를 통해 승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무정견한 야당세력도 그것을 시대착오적 방식으로 이용했다. 이 때문에 결국 국민장은 죽음의 정치적 제전이 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민주주의의 숭고한 이상은 맹목적이고 통속적인 우상으로 변질되고 있다. 우상 숭배의 해악은 그것이 언제나 위선과 부도덕과 탐욕의 온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착한 국민에게 그러한 해악이 돌아가야 하겠는가.
양승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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