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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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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입력
2009.06.15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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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에 겨워

거품 물까 봐

지쳐 잠들까 봐

때까치며 지빠귀 혹여 알 품지 않을까 봐

뻐꾸기 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 뻐꾸기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으로 뉘우치는 일

멀리서 울음소리로 알을 품는 일

뻐꾸기 운다

젊은 어머니 기다리다

제가 싼 노란 똥 먹는 어린 세 살

마당은 늘 비어 있고

여름이란 여름은 온통 초록을 향해

눈멀어 있던 날들

광목천에 묶여 있는 연한 세 살

뻐꾸기 울음에 쪼여 귓바퀴가

발갛게 문드러지던 대낮들

그곳 때까치 집, 지빠귀 집

뻐꾸기가 떨어뜨려놓고 간 아들 하나

알에서 나와 운다

뻐꾸기 운다

● 중년으로 넘어가는 한 인간이 유년을 추억한다. 유년 속에 들어있는 존재가 형성되던 결정적인 순간을 향한 추억. 유유한 산책자 시인 이문재의 유년을 들여다 본다.

여름.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가야 하기에 아들을 광목천에 묶어 두었는지, 세 살 난 아들은 '제가 싼 노란 똥'을 먹으며 뻐꾸기가 우는 소리를 듣는다. 뻐꾸기는 제 알을 남의 둥지에 낳는 새. 알은 다른 어미 새에게 맡겨진다.

여름과 여름 새들의 울음소리 속에서 징하게 고독했던 세 살의 아이. 그리고 문득, 그 아이는 자신이 뻐꾸기였다는 걸 생각한다. 징한 유년의 한 풍경이 그려내는 존재 형성의 이 지독한 순간!, 장년으로 들어가면서 넘어가면서 유년을 떠올리는 도시 속의 한 남자, 그의 삶도 쉽지는 않나보다. 마치 '뻐꾸기 울음에 쪼여 귓바퀴가 발갛게 문드러지던' 것처럼 그렇게 삶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나보다.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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