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63> 이베트 지로 와 앤 마그리트 한국공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63> 이베트 지로 와 앤 마그리트 한국공연

입력
2009.06.15 22:51
0 0

'피처럼 진한 것이 샹송'(Chanson)이라고 말한다. 원색적인 공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세계인들에게 내세우는 자존심 중의 하나가 바로 샹송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여자 샹송 가수들이 줄지어 데뷔 했지만 그 중에서 여왕 중의 여왕은 역시 에디트 피아프이다. 그 다음으로 줄리에트 그레코, 그리고 이베트 지로와 자클린 프랑소와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이베트 지로가 우리나라를 두 번이나 찾아와 공연을 했다. 첫번째는 1962년 9월이었고 두 번째는 68년 6월이다. 나는 두 번째 공연을 하러 온 지로의 통역을 맡았고 그녀와 함께 당시 TBC-TV에 출연 하여 여러 가지 주제로 대담을 했다.

그녀는 원래 음악회사의 속기사 겸 피아니스트로 있다가 가수로 픽업 되었고, '오르탕시아 아가씨'라는 노래로 데뷔를 했다. 신인가수의 노래지만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그녀는 일약 대스타가 되었다.

30세의 나이로 다른 가수들에 비해 늦게 출발을 했으나 '시인의 혼', '미라보 다리', '꼬마 구두장이' 등 연이은 히트곡으로 레코드계의 여왕으로 불리었다.

그녀의 한국공연은 모두 한국일보의 초청으로 성사 되었다. 첫 번째 공연에서는 손석우 작곡 '노란셔츠의 사나이'를 우리말로 부르고 레코드 취입까지 했고 두 번째에는 이봉조 작곡 '안개'를 역시 우리말로 노래해서 박수를 많이 받았다. 이때는 특히 '아빠 엄마 좋아'라는 코믹한 노래를 나이 어린 박혜령(당시 6살)양과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매우 특이한 습관을 갖고 있었다. 레코드 취입을 하기 위해 녹음 스튜디오로 들어가서는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고 한참동안 기도를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자신만 갖고 있는 오랜 습관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무대에서 공연을 할 때 그녀의 진지한 모습에 스탭들은 모두 놀랬다.

세계적인 가수이고 오랜 경험을 갖고 있는 그녀인데도 공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두 손을 마주 잡고 무대 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냥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발성 연습을 하며 다니곤 했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조차 가까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남편은 그녀보다 9살이나 연하인데 작곡가이고, 편곡자이며, 피아노 반주를 맡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마르크 에랑은 나한테 "저 사람 근처에 아무도 가지 않게 하고 혼자 명상할 수 있게 스탭들에게 말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어디서든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심각하게 숨 고르기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대스타 다운 면모였다. 과문한 탓인지 우리나라 가수들 중에 이베트 지로 처럼 무대 뒤에서 진지하게 준비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항상 특유의 환한 웃음을 보이는 그녀도 선배가수 '에디트 피아프' 이야기가 나오자 금새 눈 주위가 붉어졌다. "에디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눈물만 흘리느라고 3개월 동안 일절 노래를 못 불렀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60년대 말에 또 한명의 세계적인 톱스타가 한국 공연을 해서 팝을 좋아하는 팬들을 흥분 시켰다. 가수이고 영화배우이며 미국의 섹스 디바로 인기 절정에 있던 앤 마그리트(Ann-Margret)가 한국을 찾았다. 역시 한국일보가 초청을 했고, 나는 그녀의 통역 겸 공연 사회를 맡았다.

41년생이고 스웨덴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5살 때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귀화를 했기 때문에 미국인이다. 공연 스케줄 관계로 우리나라에서는 단 1회 공연만 하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신곡을 홍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우리나라의 팬들이 좋아하는 옛 노래도 불러 달라고 부탁을 했다.

우리나라에는 그녀를 좋아하는 팬들이 아주 많았고 대규모의 팬 클럽까지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앤 마그리트의 초창기 노래들을 좋아했다. '슬로울리(Slowly)', '내가 어찌 하오리까(What am I Supposed to Do)' '피버(Fever)' 등을 들으려고 잔뜩 기대 했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가지고 온 레퍼토리에는 그런 노래들이 거의 빠지고 새로 취입한 음악 중심으로 엮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로저 스미스(Roger Smith)와 함께 공연 전에 선곡 문제를 놓고 회의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슬로울리 같은 노래는 워낙 오래 전에 부른 노래라서 반주 악보도 없고 가사도 가물거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로저 스미스가 피아노 반주를 하고 가사는 그녀의 기억을 믿기로 해서 공연을 했다.

앤 마그리트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미국의 언론들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고 평을 한 것이 과장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앙콜?여섯 곡 이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녀의 남편 로저 스미스는 그녀보다 먼저 인기 스타 반열에 올라 있던 가수 겸 배우였다. 그러다 그녀와 결혼 한 이후 매니저 겸 피아노 반주자로 함께 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장실에서 쉬는 동안 앤 마그리트는 남편의 어깨를 계속 마사지 해 주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 했다. 조금 있으면 노래 부르러 나가는 부인을 남편이 마사지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거꾸로 되어 있으니까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당시 남편 로저 스미스가 건강이 좋지 못해 한국에 함께 오지 못할 뻔 했다고 한다. 앤 마그리트는 미국으로 돌아 간 뒤에 나와 한국일보에 감사편지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는 이외에도 많은 외국의 스타들과 직간접으로 연결이 있었다. 영국의 톰 존스(Tom Jones) TV쇼를 통역하는 디스크자키를 1년간 했고,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 공연의 사회를 봤고, 판토마임의 거장 마르셀 마르소가 한국공연을 했을 때 역시 사회를 봤고 함께 TV에 출연을 했다.

일본 밴드 '블루 코메츠'의 공연도 내가 관여했다. 신문기자가 이토록 분주하게 여러 가지를 맡은 이유는 내가 몸담고 있던 한국일보가 벌인 문화 사업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한테도 약간의 끼가 있었던 모양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