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격렬하게, 탐욕스럽게 진실을 위해서만, 그리고 관객에게 책임질 수 있는 연극 행위를 한다!" 1977년 한 중국집에서 극단 연우(演友)무대의 씨앗이 투하됐고, 1년 뒤 첫 결과물로 나온 '아침에는 늘 혼자예요'는 그렇게 선언했다. 창작극만을 고집했다. 연극이라는 렌즈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자 했던 욕망은 필연적으로 기존 질서와 버성길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초 6개월 공연정지 처분을 불렀던 마당극 '나의 살던 고향은'(1984)의 기억도 아득한 풍경이다. 정권에 밉보인 단원들이 당국과 숨바꼭질을 해야 했던 시절도, 서울 한복판에서 땔감을 구해 모닥불을 피우며 버텼던 시절도 있었다.
연우무대 대표로 풍상의 세월을 감당하다 한 발 물러나, 8년째 예술감독으로 있는 정한룡(63)씨가 터득한 지혜가 있다. "먼 길을 가려면 절대 뛰지 마라. 그러나 쉬지는 마라"는 중국 속담이다.
그는 "한국은 단거리 선수가 가장 우대받는 나라지만, 5~10년 뒤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허겁지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 전략이었다. 동그랗게 뜬 연우무대의 두 눈은 시대를,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 연우무대를 상징하는 심볼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두 눈의 발상은 연출가 김광림, 디자인은 연출가 이상우가 했다. 지우개를 파서 만든 작품이다. 극단 이름보다 마크가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 큰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학로와 떨어져 있다 해서 '오프 대학로'라는 얄궂은 구분법으로도 불린다. 큰 길 너머의 상황을 어떻게 보나.
"요즘 사람들이 걷는 걸 싫어하다 보니 '오프'로 편입된 셈이다. 연극 관객이 감소한다는 말도 있는 것 같은데, 공연장 증가 추세에 따른 희석의 결과로 보고 싶다. 그것보다는 IMF사태를 계기로 해 연극 고유의 자생력이 소실돼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 연극을 하는 것 자체도 버거웠을 텐데 창작극만 고집했다.
"우리는 연극을 통해 현실을 비판해 왔다. 그런데 1987년 6ㆍ10 민주항쟁 이후 사회비판적 연극이 차츰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연우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흔들릴 정도였다. 1992에는 집행부에서 '명예롭게 자폭하라'는 해체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 당시 극단을 떠나 광고회사에 있던 내게 메시지가 왔다. 극단 창립 최연장자인 나의 결정을 따르겠다며. '나서 달라'는 말보다 더 무서웠다. 나 아니었다면 연우무대는 '아름답게 자폭한, 전설의 극단'이 됐을 거다."
- 모진 세월 속에서도 연우무대가 지난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는 사실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연우 30주년> 이라는 두툼한 책까지 나왔다. "그놈의 정 때문에" 결국 대표까지 맡게 된 당신의 소회가 책의 서두였다. 연우>
"대표 일은 '내가 생각하는 연우는 아닐지라도 이 시대가 원하는 연우라면 그 또한 좋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으로 해 왔다. 현재는 전부터는 극단의 실제적 일들은 젊은 친구들한테 넘기고 예술감독 일에 전념하려 한다."
- 대선배로서 현재의 연우무대를 정리하자면.
"세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최근 공연한 '해무'는 연우무대가 쭉 해온 정극 스타일이다. 2006년 첫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를 하고 뮤지컬대상까지 받아 또 하나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자칫 대중 영합에 빠질 수도 있을) 뮤지컬 공연은 우리가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다. 현재의 대표 유인수가 독립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쌓은 뮤지컬 프로듀스 경험이 새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 밖에 어린이 연극도 중요한 작업이다."
- 연우무대는 어떻게 출발했나.
"서울대 연극반의 선후배가 1977년 2월 5일에 만든 '목요모임'이 시초다. 실제로 연우의 출발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던 것은 그 해 여름이었지만. 우리의 모태였던 그 날을 극단 창립일로 정하게 됐다. 무명 작가의 창작극을 무명의 연출가가 아마추어 배우를 데리고 공연하겠다는 비상식적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범(汎)서울대 연극 인력'이 모여 만든 결과였다."
- '연극하는 벗들'(演友ㆍ연우)의 전신인 셈인가.
"6개월 지나니 대충 걸러졌다. 나, 이상우, 김광림(이상 서울대 문리대 출신), 이영훈(국립경주박물관장), 조우연(성균관대 의상과 교수), 김영기(경북대 철학과 교수) 등이 남더라. 대학 동창이기도 한 3명은 부모의 고향이 함경도라는 공통점도 있다.
내가 연출한 '아침에는 늘 혼자예요'가 창립 공연작이었다. 그 후 미국서 연극을 제대로 공부한 김석만이 뒤늦게 합세해 '한씨 연대기'를 만들며 전문 극단으로 자리잡았다. 이상우가 연출한 '우리들의 저승'은 작가ㆍ연출가ㆍ배우들의 조립과 분해를 거친, 공동 창작품의 효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창작극을 하면 미친 놈 소리 듣던 당시, 그 작품으로 창고소극장에서 주는 상까지 탔다."
- 지금은 자연스런 방식이지만, 공동 창작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을 텐데.
"아마추어리즘의 장점을 극대화해보자는 생각의 결론이었다. 당시 스타 위주의 연극 풍토에 대한 반발심도 컸지만, 연극을 계속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서 우리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삐딱하게 보고자 했던 우리가 원했던 작품을 기성 작가에게서는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우리의 역량도 달렸다. 그래서 나온 결론인 셈이다.
초기에는 일반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나온 황석영 원작의 '장산곶매'는 빛나는 순간이었다. 서울대 탈춤반 출신 등 친(親)연우 세력이 규합하는 계기였다. 김석만의 고교 선배인 황석영과 연우가 인연을 맺어 '돼지꿈' '장사의 꿈' '손님' 등 황씨의 소설이 연극화됐다."
- 연우무대를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 전기가 된 작품은.
"'한씨연대기'와 '칠수와 만수'다. 우리 연극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려는 노력은 창립 때부터 의식적으로 해 왔다. 우리는 처음부터 관극회원 제도를 운영했다. 원고지 5장에 우리 연극에 대해 소감을 적어 보내라 했더니 3,000여명이나 몰리더라. 사실 그 인원이 계속 갔더라면 연우는 든든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연극은 관객의 주류가 20대 초반의 여성이라는 게 문제다. 결혼하면 (연극과의 인연이) 끊겨지고, 집을 옮겨도 인연이 끝난다. 그들이 한국 연극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우리 연극 최대의 문제다. 당시 우리가 성공했던 것도 이화여대 신입생의 명단을 어렵사리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 의식 있는 작품으로도 객석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연우무대는 우리 문화의 소비 패턴을 바꿨다. 무대 전략이 있었다면.
"'한씨 연대기'의 경우, 원래 인물도 많고 멜로적 요소가 강했다. 그런데 서사적 기법(역할바꾸기 등)으로 배우 5명만 갖고도 무대를 만드니 '멜로 끼(氣)'가 싹 가셨고, 훈련을 거쳐 앙상블로 엮어내니 당시 관객의 눈에 신선했다. 그런 식의 양식적 실험에 달려든 게 험한 세월을 버텨낸 힘이다.
우리는 뭣보다, 언더그라운드로 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공연윤리위원회의 대본 반려, 부분수정 조치는 물론 실연(實演) 심사까지 사사건건 트집 잡혔지만,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통과하는 기술을 체득했다. 대본을 실연용, 검열용으로 따로 준비했다."
- 브로드웨이 뮤지컬만으로도 어지러운 현재 연극판에서 연우무대가 던지는 의미란.
"우리는 대극장-번역극 중심이던 한국 연극을 창작극-소극장-연출가 중심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현실 비판을 그 중심에 둔 우리의 창작방법론은 타 극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무대 현장을 풍성히 한 이상우가 그 예다. '칠수와 만수' 초연 때, 오줌 누는 장면에서 손가락을 바지 사이에 낸다는 그의 아이디어는 이내 따라 하더라."
-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표작들을 모아 상설 레퍼토리식 무대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때그때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다보니 시의성에 함몰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통일 문제를 주제로 사회의 관심을 부쩍 끌었던 '김치국씨 환장하다' 같은 작품은 몇 년만 지나도 상황이 너무 바뀌어 재공연이 불가했다. 인기작 '칠수와 만수'도 그대로 갈 수 있었던 기한이 10년이었다. 기동성과 미학의 결합을 추구하는 우리의 운명으로 본다."
- 형식적ㆍ내용적으로 '연우적'이란 가치가 분명 있다. 어떻게 규정하겠나.
"자연스럽고, 편한, 소극장 작품이다. 기존의 방식대로 잘 훈련된 배우는 오히려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1993년 연출가 이윤택씨가 나한테 이런 장담을 한 적 있다. '좌에 연우를 놓고 우에 목화를 놓은 뒤, 그 사이로 가면 나는 성공한다'고."
- 앞으로 한국에서 연극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리라 보나. 각종 볼거리에 포위돼 가는 연극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다.
"뮤지컬처럼 문화와 산업이 결합하는 양상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순수 예술은 독자적 발전이 불가능하다. 현재 정부의 나눠먹기식 단기간(1~2년) 소액 다수 지원제도를 개선, 엄격한 심사ㆍ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지원, 제 색깔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남들이 잘 하지 않는 비판적 작품을 추구,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였다."
● 연우 가족극장
2000년 정한룡씨가 연우무대 대표에서 물러난 것은 '연우 가족극장'에 전념하기 위한 행보였다. 한 10년째 교사들로부터 "아이들한테 맞는 연극이 없다. 유치원 대상 연극뿐"이라는 하소연을 접해온 터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야말로 '관극의 사각지대'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식구처럼 지내는 배우들의 입장도 딱했다. 연기폭이 좁고, 생활도 안 되니 아동극 하라면 그만두겠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할 정도였다.
문예진흥원의 지원으로 시작된 '소외지역 찾아가는 공연'으로 터를 잡았다. '개구리에 한솥밥'(2006), '대장만세'(2007), '별이 된 물고기'(2008) 등은 조명기구와 간단한 세트만 들고 찾아간 무대였다.
주로 초등학교 강당에서 무대가 펼쳐지는 이 유랑극단은 올해부터 '꿈꾸는 문화열차'로 이름을 바꾼다. 그는 "가족극은 힘 닿는 데까지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병욱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