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닷새째인 지난달 27일 김해 봉하 마을 빈소의 영정에 하양나비 한 마리가 날아 들었다. 이틀 뒤인 29일에는 서울로 가려고 기다리던 운구차 위 전선에 흰 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앉아 눈길을 끌었다. 그날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제 도중 권양숙 여사의 눈길은 서쪽 하늘에 살짝 걸린 무지개 색 석양에 잠시 머물렀다.
자연스러운 우연도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 보인다. 가령 무심코 지나칠 때는 모르다가도 자세히 살펴보면 길가의 이름 모를 풀꽃 하나하나가 그리 예쁠 수 없다. 들여다보려고 하는 순간 이미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낄 마음의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다.
배추와 무, 양배추 꽃이 피는 계절에 나비가 고인의 영정을 두른 꽃 향기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이어진 조문행렬이 아니었다면 훨씬 많은 나비가 빈소에 날아들었을 만하다. 도회지의 비둘기는 점점 짙은 회색을 띠어가고 있지만, 시골에는 아직 흰 비둘기가 남아 있다. 구름의 가장자리를 흐릿한 무지개 색으로 물들인 석양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새로운 '희생양 기제' 만들기
그런 것들이 경이와 성스러움을 띠고,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것은 어색하지 않다. 나라 전체에 넘친 애도의 물결이 기어코 찾아내었을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유족과 조문객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고, 국민이 충격과 슬픔을 딛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제의 특유의 힘을 보탰으리란 점에서 오히려 다행스럽다. 하양나비나 흰 비둘기, 무지개 색 석양은 상징성이 커서 옛날이라면 신화의 장식물이 될 만하지만 어차피 21세기에 통용될 상징물은 아니다.
반면 국민적 추모 열기를 타고 삽시간에 빚어진 '노무현 신화'는 개명천지에서도 전통적 신화 만들기의 기제는 변함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 신화의 핵심 축은 고전적 신화와 마찬가지로 '희생'이다. 검찰의 무리한 표적 수사, 나아가 이명박 정부의 정치보복 의지가 노 전 대통령을 겨누어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을 향한 정권의 폭력적 기도에 많은 국민이 동참했고, 지금 '조문 정국'으로 톡톡히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는 민주당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줄거리가 등장한다. '노사모'를 비롯한 적극적 지지자뿐만 아니라 많은 조문객과 민주당이 '지켜주지 못해서', 또는 '비난 대열에 같이 서서' 죄송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런 죄스러움은 곧바로 노 전 대통령의 모든 결점을 지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는 맑고 올곧은 지도자였고, 늘 불굴의 의지로 불의와 싸웠고, 윤택한 서민 삶과 남북 평화를 위해 노력한 무결의 지도자로 탈바꿈했다. 검찰 수사로 드러난 명백한 비리조차도 다른 비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말끔히 지워진다.
여기까지는 르네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 에서 밝힌 '희생양 기제' 그대로다. 인간의 모방 욕망에 따라 개인의 차이가 줄어들면 경쟁과 갈등이 격화해 폭력성을 부르고, 폭력의 대리만족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려는 집단의식이 희생양을 찾고, 집단적 가해자들은 사후에 희생양에게 기꺼이 후광과 성스러움을 부여한다. 그에 따르면 신화란 1인에 대한 만장일치적 폭력을 가해자 시각에서 기술한 사건과 다름 아니다. 폭력과>
역사도 먼 마당에 과학은 무슨
비역사적이고 비과학적인 의식과정이지만 '노무현 신화'가 여기에서 끝나기만 해도 좋았다. 모든 국민이 애도를 표하고, 저마다의 크기와 색깔로 죄스러움을 간직하고, 더 맑은 사회의 실현을 다짐하고, 그런 국민의 뜻으로 정부의 국정쇄신을 이끌어 냈다면 결과적으로 신화의 순기능이 빛났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맡겨야 할 직전 대통령의 평가를 곧바로 신화에 편입, 역사로 만들려는 의도의 과잉은 역사의 거울인 현재에 대한 과장과 왜곡을 낳았다. 이명박 정부는 반민주적 타도 대상이 되고, 과거의 오류를 시정하려는 정책까지도 부당한 것으로 매도되기에 이르렀다.
신화가 횡행해 과학은커녕 역사를 찾아가기도 어려운 나날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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