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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시간없어 병원에 못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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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시간없어 병원에 못가는데…

입력
2009.06.1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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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철에는 부지깽이도 들판으로 나와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요즘은 제게도 숨 돌릴 짬도 없을 만큼 바쁜 나날입니다. 눈 뜨기 무섭게 들에 나갔다가 해가 저물어 캄캄해서야 집으로 돌아와서도 다음날 세끼 먹을 쌀 씻어 놓습니다. 그리곤 눕기 바쁘게 잠을 자는데도 이젠 나이 때문인지 온 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답니다.

이렇게 삭신이 쑤시고 아픈 날은 병원이라도 다녀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물리치료란 게 워낙 오래 걸리는지라 시간이 아까워서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너무 아파서 일어 날 수가 없더군요. '그래 10분 만 더, 10분만 더…'하는 와중에 남편은 먼저 들로 나가고 저는 그만 깜박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어렴풋이 들리는 아이들 소리에 비몽사몽 일어나서 주방에 딸린 미닫이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들판 한가운데 있는 우리 집은 중학교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재잘재잘… 까르르… 하며 등교하고, 저만치 논에는 어느 새 새벽녘에 모내기를 마쳤는지 모판을 정리하는 평촌댁 아줌마의 부지런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활력 있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니 금방 정신은 맑아지데요. 하지만 몸은 여전히 물 먹은 솜 뭉치… 손가락 하나 까닥 할 기력마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4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3년 전부터 수확하기 시작한 복숭아나무 밭에서 하루 종일 여덟 칸 사다리 꼭대기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열매 솎아내는 중간에 생강도 좀 심었습니다. 고추 모종 옮기고, 참깨 옥수수 야채거리 등, 이것저것 우리 땅이란 땅에는 모두 씨앗을 심어놓았습니다. 열매 솎아낸 복숭아 봉지를 싸다 말고 모 심고 콩도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복숭아 봉지 싸는 일을 아직 절반도 못했습니다. 마음은 바쁜데 몸이 아파서 그런지 괜히 서러운 생각이 들데요. 그래서 그냥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등교하는 아이들 중에 유독 키 작고 가냘픈 여자애가 눈에 띄었습니다. 가방이 무거운지 상반신을 떼밀리 듯 앞으로 내민 채 힘겹게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 뒤로 문득 저의 유년과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 하면서부터였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 등교길을 보살펴 주셨던 것은.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부는 날에는 동네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큰 다리까지 따라오셨습니다.

"미씨야! 바람이 씬게 가상(가장자리)으로 가먼 큰일나. 항시 가운데로 가그라잉!" 그러면 저는 다리 정중앙에서 난간 쪽으로 한 걸음 한걸음 옮기며 그랬습니다. "여기도 괜찮고, 여기도 괜찮당께. 아부지 언능 가랑께!"또래 친구들 보다 몸이 허약하던 제가 바람에 날아갈세라 걱정도 많고 많으셨던 아버지 마음을 다 알면서도 다리 난간에 까지 올라섰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저와 참 많이도 닮아 보이는 저 작고 가냘픈 여자아이….

우리 아버지는요. 누군가 무엇이 몸에 좋다더라 하는 말을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구해서 저만 먹이셨습니다. 하루는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하기에 골목에서부터 소리소리 지르며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엄마~! 아부지! 학교 갔다 왔어!" 여느 때 같으면 "오냐!" 하시며 반겨 주시던 아버지가 그날은 얼른 정재(부엌) 문을 닫아 버리셨습니다. 구수한 냄새가 진동 하는 정재 문을 말입니다.

"뭐여, 뭐 묵어?" 저는 정재 문틈 사이에 코와 눈을 박고는 소릴 질렀습니다. 아버지는 아궁이 앞에서 등을 돌리고 계셨습니다. 맛난 냄새…. 한참 만에 아버지는 노르스름한 벌레 같은 것을 양재기에 담아 들고 나오시더니 하나 먹여 주며 그러시데요. "뻔데기 쪼까 얻어다 볶았당께. 누가 오기 전에 언능 묵어부러잉!" 바삭하게 볶은 번데기… 그땐 그것이 정말 번데기 인줄 알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굼벵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제 몸에 좋다 하면 무엇이든 다 구해서 먹이셨던 아버지 덕에 힘든 농사일도 거뜬히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피로가 쌓여간다 싶더니 지금은 뼈마디 마디마다 쑤시고 아리도록 일을 하는데도 돈은 안 되고…. 이래저래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면서 몸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주방에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 때 성난 남편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여적 뭐 허는가? 밥을 내와야 헐 것 아니여!!" 벌써 아침 10시가 훌쩍 지났으니 무척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습니다. 얼른 뚝배기에 계란 두 개 휘휘 저어서 찜을 하고 김치 한 포기 썰어서 간단한 상을 차렸습니다. 밥상에 앉은 남편의 눈빛은 냉랭했습니다.

남편은 젓가락으로 밥상을 톡톡 쳐가며 "여적 잤냐?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쯧쯧… …." 얼굴이 왜 그렇게 부었느냐, 어디 아픈 것은 아니냐? 라고 물어주면 좋으련만 도리어 게을러 터졌다고 타박부터 하려는 남편입니다. 남편도 힘들고 지치고 배까지 고팠으니 화가 날만도 하건만 왜 이리 서운한지요. 만약 이럴 때 우리 아버지였다면….

에휴~! 남편은 남편이고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을 지금 제가 뭘 바라는 것인지…. 그렇게 남편은 남편대로 잔뜩 골이 나서 혼자 일 하러 가고 저는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제 허리를 신경 써서라도 당분간은 절대 휴식을 취하라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제가 쉴 팔자가 아니라 그런지 의사 선생님 말씀보다는 오늘 혼자 일하고 있을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드네요. 아무래도 제가 쉴 팔자는 아닌가 봅니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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