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날것, 묵힌것, 달라도 끌림은 닮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날것, 묵힌것, 달라도 끌림은 닮은…

입력
2009.06.12 05:49
0 0

■ 날것의 맛

나는 날것의 맛이 좋다. 무릇 최상의 요리란, 인간의 손으로 덜 조물락거릴 때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날것으로 먹으려면 신선해야 한다. 말이든, 소든 육회(잘게 다져 밑간을 한 요리)나 육사시미(생선 회 뜨듯이 얇게 썰어 낸 육고기)의 형태로 먹으려면,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러나 숙성을 제대로 시켜 억센 맛을 뿜지 않는 놈이어야 한다.

대구의 터줏대감 '영천 식육식당'의 육사시미는 '뭉티기'라 불리는데, 일요일에는 맛을 볼 수 없다. 신선도 때문이다. 선홍색을 띠는 팔팔한 날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면, 불에 지져 먹는 맛은 한 수 아래로 느껴진다.

소가 갖고 태어난 본연의 맛에 가깝게 먹을 수 있으니, 밀림의 제왕 사자라도 된 듯, 야생적이고 뿌듯한 충족감까지도 맛 볼 수도 있다.

해남의 '장수통닭'에서 먹는 닭 회의 맛은 또 어떤가. 뒷마당에 풀어 키우는 싱싱한 닭을 잡아, 가장 쫀득한 부위를 회로 떠서 나오는데, 소금과 참기름에 살짝 찍어 먹으면 '이게 정말 닭이야?'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탄탄한 육질은 씹는 맛이 좋아서 불에 익혀 퍽퍽해지는 맛과는 대조적이다. 닭 요리의 관건인 '잡냄새'도 장수 통닭에서 잡는 A플러스 급의 닭이라면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식재료는 신선할수록 본래 가진 냄새만 내기 때문에 신선도가 떨어질수록 잡냄새는 심해진다.

육사시미든 닭 회든 포도 한 송이든, 산에 놀러갔다가 따 먹는 오디든, 인간이 '화식(火食: 불에 익혀 먹음)'을 시작하기 이전에 먹었던 '생식(生食)' 형태의 음식들이 여러모로 건강에 더 좋다고도 한다. 결국 최고의 요리는 인간의 모자란 손이 덜 간, 신이 주신 그대로의 맛이라는 거다.

■ 시간의 맛

맛도 월등하고 영양가도 더 좋은 날것을 어떻게 하면 더 오래, 더 잘 먹을 것인가. 오랜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는 날것의 식재료에 시간의 마술을 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생(生) 매실을 큰 유리병에 담고 설탕을 부어 삭힌 매실청이 있으면, 오뉴월 제철 매실의 맛이나 소화를 돕는 영양분을 사철 누릴 수 있다.

비슷한 공정으로 만드는 것에 유자청 또는 각종 과실주가 있다.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과실의 생명을 연장시킨 맛. 식재료 본래의 유통 기한을 연장하면서 동시에 가치가 상승하는 '발효'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해낸 최고의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각종 장류, 젓갈과 장아찌는 신이 주신 식재료를 한 단계 발전시킨 뿌듯한 요리법이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동양에서 설탕이나 소금, 식초에 절이듯, 서양에서도 비슷한 조리법을 생각해 냈다는 점이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지구 어디서나 똑같이 치열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의 오래된 골목에는 '레 두 꺄나르(Les deux Canards; 두 마리의 오리)'라는 상호의 맛집이 있다. 50년 넘은 레시피는 주인장의 엄마 때부터 내려오는 그대로란다. 프랑스 사람들이 치즈나 와인 등의 발효 식품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곳의 오리고기를 보고는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유자청 담그듯, 제철 오렌지를 얇게 저며 썰어 병에 담고, 바닐라 빈을 섞어 두었던 향기 좋은 설탕을 부어 그대로 묵히는 것부터 요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삭힌 오렌지가 3년산, 5년산부터 시작해 20년산까지 모두 레스토랑 내에 비치되어 있다. 직접 담근 인삼주나 오미자 술을 진열해 둔 한국의 여느 음식점들과 그 모양새가 다르지 않으니 재미있다.

삭힌 오렌지로 요리를 만드는 것이 이 집의 비결로, 그 범위가 샐러드로부터 인기 높은 오리 찜 요리까지 다양하다. 묵은 오렌지청을 어디든 넣기에, '레 두 꺄나르'의 음식에서는 콤콤한 발효 풍미가 난다.

함께 맛을 본 일행 중 한 명이 '남도 음식을 먹는 것 같다'고 했을 만큼 독특한 맛이다. 이렇게 요리하는 이유는 고유한 맛을 만들고, 더불어 소화를 돕는 영양분까지 그 효과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10년 묵은 오렌지 절임을 곁들인 오리 간 요리를 먹다 보면, 프랑스 식 '간' 요리와 궁합이 잘 맞는 소테른(sauterne)산 와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최고의 와인 산지인 프랑스의 보르도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 소테른에는 '크뤼 수페리어(cru superieur; 특등급 와인)'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샤토 디켐(chateau d'Yquem)'이 있다. 15세기에 지어진 소박한 고성 앞으로 펼쳐진 포도밭에서 세계 최상급의 포도를 기르고, 매년 사람 손으로 알알이 수확한 다음, 거기서 다시 최상급의 포도만 취해서 와인을 만든다.

포도나무 자체의 자생 양분과 향기, 맛이 오랜 세월 인정을 받아 온 와인으로 그 향기는 잘 익은 백도나 오렌지잼 같기도, 아카시아 꿀이나 라일락 꽃다발 같기도 하다.

맛 자체는 달달한 편이어서 흔히들 '디저트 와인'으로 분류하지만, 정작 소테른 사람들은 샤토 디켐을 블루치즈나 오리 혹은 거위 간 요리와 먹을 때 최고의 궁합이라며 식사 중에 마셔 볼 것을 권한다.

와인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고 있기만 해도 은은한 자연의 향기가 온 몸에 퍼져 행복한 기분이 들고, 신이 주신 포도에 인간의 손으로 '시간'을 더해 만든 합작품이라는 생각에 괜히 으쓱해진다.

'시간'이 더해지면 무엇이든 맛있어지는 것일까 생각하다 보면, 우리 살아가는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십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영양 넘치는 사람인가 짚어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오늘의 삶을 더 분발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타이틀까지 누려가며 자연 속의 영원한 철부지로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매실처럼, 포도처럼, 간장처럼, 김치처럼, 와인처럼 묵힐수록 맛이 더 깊어지려면, 기다릴 줄 알고 맑은 마음을 지니도록 늘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사는 것이 바빠서', '세상이 각박해져서'라고 핑계를 대는 나는 잘 익은 장아찌를 따라잡기에도 내공이 한참 모자라니 말이다.

음식에세이 <밥 사> 저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