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가 된 기분이다. 통합된 유럽이 시장을 확대하고 일자리를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동유럽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앞세워 우리 일자리를 빼앗았다. 이래서야 유럽 통합을 좋은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프랑스 북부 아미엥 굿이어 던롭 타이어 공장에서 13년간 근무하다 해고된 티에리 파고(36)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27개국 4억9,100만명을 단일 시장으로 통합, 미국보다 30%나 더 많은 국내총생산(GDP)을 기록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이 경제위기 속에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9일 보도했다. 회원국 정부는 자국 일자리와 시장 지키기에 몰두, 다른 회원국의 희생을 모른 척하고 유럽중앙은행(ECB) 차원의 경제위기 탈출 정책은 이해가 상반되는 회원국들의 논란 속에 시기를 놓치고 추진력을 잃는다고 NYT는 보도했다.
이런 분열상을 반영하듯 유럽 통합의 대의는 퇴색하고 최근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 투표율은 사상 최저인 43%를 기록했다. 녹색당 출신인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은 "EU는 심각한 리더십 부재 속에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민족주의와 EU 공동 이익의 상충
EU의 성공은 회원국들의 고유 주권인 통화, 무역, 관세 등의 규제를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경제위기로 선거 패배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각국 정부가 이 같은 주권 포기를 고수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각국 정부는 EU의 대의를 무시하고 자국 산업과 노동자 보호에 나설 수 밖에 없다. 잘 사는 서유럽 회원국도 자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동유럽 역시 이민 노동자의 송금 격감과 자국 자산가치 폭락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NYT는 이 같은 민족주의 강화 추세가 아직 EU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라면서도 이 때문에 EU의 대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힘을 잃고 있다고 진단했다. 피셔 전 장관은 "유럽 전역의 경제위기로 EU 집행부인 유럽위원회(EC)에 주도적 역할이 요구되지만 EC는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
EU의 쌍두마차 독일, 프랑스의 분열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ECB를 통한 공공자금 투입 확대로 전유럽 차원의 경기부양을 꾀했다. 하지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공공자금 투입 확대가 국가재정 악화를 초래하고 물가상승을 부추길 것이라며 반대해 무산시켰다.
메르켈 총리는 프랑스 자동차산업 보호를 위해 공적자금 수십억 달러를 투입한 사르코지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제너럴모터스(GM)의 독일 자회사 오펠을 살리기 위해 거액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모순을 보였다.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은 "과거 유럽 주요국 지도자들은 늘 EU 결속력 강화를 지지해 왔는데, 최근에는 역사를 거스르는 것 같다"며 "자국 이해에만 매달리면 정치적 이익을 거둘 수 있겠지만 그건 '정책'이 아니라 단순한 '반응'에 불과하다"고 EU 회원국 지도자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정영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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