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가 태어난 날, 가판대에서 일간지를 모조리 사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는 분이 있다. 아이가 나중에 커서 그 신문을 보게 되면 자신이 태어난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필자도 생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찾아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중요한 일이 벌어진 날은 아니어서 실망(?)하기도 했다. 이른바 '오늘의 소사(小史)'를 즐겨 찾아보게 된 것도 그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의 일이다.
날짜의 아이러니로 친다면 6월 15일만한 것도 없다. 1999년 6월 15일에 이른바 1차 연평해전이 발발했고 바로 이듬해인 2000년 6월 15일에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불과 1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날짜에 남북 간 화해협력과 긴장충돌을 상징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6월 10일의 경우에는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 순종 황제의 출상일을 기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 이른바 6.10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문학작품 속 특정 날짜가 각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경우도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 의 배경이 된 하루인 6월 16일(1904년)이다. 이 작품은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에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과 그의 아내 마리언 블룸, 예술가 지망 청년 스티븐 데덜러스 등이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겪는 하루 동안의 일을 담고 있다. 전 세계 제임스 조이스의 팬과 문학가들은 매년 이 날을 주인공 블룸의 이름을 따서 블룸즈데이로 일컬으며 작가와 작품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다. 율리시스>
기념하거나 그 뜻을 새겨야 할 날도 참 많다. 3월을 예로 들면 법정공휴일이자 기념일인 3.1절 외에 납세의 날(3.3), 세계여성의 날(3.8), 상공의 날(3.21), 물의 날(3.22), 기상의 날(3.23) 등이 있다. 가족의 달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5월도 만만치 않다. 근로자의 날(5.1), 어린이날(5.5), 어버이날(5.8), 입양의 날(5.11), 스승의 날(5.15), 발명의 날(5.19), 부부의 날(5.21), 금연의 날(5.31) 등이 사뭇 숨 가쁘게 이어진다. 몇몇 날짜를 제외하면 그런 날이 있는지 여부도 잘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되새겨야 할 이유는 충분한 날들이 아닐지 싶다.
새삼 기념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어떤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함'이라고 나와 있다. 이 정의에서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함'이라는 표현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반드시 떠들썩하게 행사를 갖지 않더라도,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면 기념일로서의 의미가 충분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런 날이 반드시 역사적인 날이거나 공식적으로 정한 법정 기념일일 필요도 없을 터이다. 오로지 나만이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비밀스러운 기념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런 기념일로 어떤 날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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