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와 철학개론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과목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은 인상이 무척 조용하셨고 깨끗하셨습니다. 말씀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억양의 높낮이도 없으셨고 어휘도 두드러지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의 결도 맑게 담담하셨던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이어 흐르는 긴 강물처럼 회상이 됩니다. 저는 가끔 '사람이 저렇게 깊고 그윽하게 고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인기가 없으셨습니다. 그 인기 없음을 왜 당연하다고 해야 하는지 저 스스로 좀 곤혹스럽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이야기해야 어쩐지 소통이 될 듯싶습니다. 아무튼 그 선생님의 철학시간은 단조롭기 그지없었습니다. 학생들 거의 모두가 이런저런 전쟁의 상흔을 지니고 있었고, 카뮈, 사르트르, 키에르케고르 등을 읽으며 전쟁 직후의 이른바 '실존'을 아프게 고민하던 것이 그 때 젊은이들의 모습인데, 그러한 정서에 메아리 치는 어떤 것도 그 선생님의 철학시간에서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주제로, 그런 고민에 직접적으로 메아리 치는 감동을 흩뿌리시던 다른 철학 교수님들의 강의가 없지 않았습니다. 교양과목을 이수해야 한다는 규정에 얽매여 어쩔 수 없이 철학개론 시간에 교실에 들어와 앉아있었지만 우리들은 너도 나도 그런 뜨거운 강좌들을 청강하면서 철학이란 어떤 것인지를 익혔고, 그 강좌에서 자신의 질식할 것 같던 정황에서 나름대로 숨통을 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리의 철학개론 시간은 따분하고 무의미하고, 역겨운 시간이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반 백년이 지난 지금, 다른 철학 강좌에서 경험했던 감동은 거의 사라졌는데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철학개론 시간에 그 따분한 선생님께서 해주신 강의 내용은 조금도 잊히지 않고 세월이 지날수록 아예 새로운 감동으로 제 속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한 내용들입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노트 한 장을 뜯어 책상 위에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 흰 종이 위에 지금부터 둥근 사각형을 그리거라!' 거침없이 모두들 펜을 들었지만 그 순간 그것이 불가능한 작업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허탈하게 웃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과제를 비웃었고, 예의 불만족을 이 기회에 털어놓기도 했고, 아까운 노트 한 장만 버렸다고 투덜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담담하게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학생들의 반응과 아무 상관없이 이어가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후 언어와 생각과 현실, 개념과 실재, 수사(修辭)와 논리, 시와 산문, 그리고 더 나아가 학문함의 엄정성(嚴正性)을 수도 없이 반추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삶을 되살피기 시작한 것이고, 내 언행을 다시 다듬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잊지 못하는 것은 인식론을 개관하시면서 우리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물음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답변을 하고 싶었지만 물음자체가 투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라니요, 물음의 주체에 따라 제각각 일 텐데요, 도대체 특정한 인식객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특정한 인식주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선생님께 답변 겸 물음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할 여유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시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네가 물은 것만 알 수 있는 거야!'
제가 지니고 있는 제 앎의 실상을 저는 지금도 이 물음 앞에서 추스르곤 합니다. 보편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남이 물어 터득한 앎을 내가 물어 얻은 것인 양 할 때가 잦습니다. 묻지도 않고 알려는 무모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배워 물은 물음을 내 물음으로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인식의 내용을 권위라든지 권력에 장하여 수용하는 때도 없지 않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내가 묻지도 않은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다듬어진 앎을 훔치고 빌리고 빼앗고 사들이곤 합니다.
글쎄요, 그러한 앎이 내 이익을 위해 효과적인 정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내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앎'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어서 다음 물음을 물으셨습니다. '너는 얼마나 알 수 있니?' 대답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네가 물은 만큼 알 수 있다.' 앎의 지평은 스스로 물음의 지평을 더 확장하여 넘어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음보다 더 많은 앎을 바라는 것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저 遲막졍?성실하지 못한 삶의 태도를 드러내줄 뿐만 아니라 실은 환상적인 기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기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잦게 이러한 인식태도를 가집니다. 물음을 심화하고 확장하기보다 물음의 범주를 넘어 인식을 구축하려는 현학적인 기교를 통해 왜곡된 인식을 양산하고도 그렇다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해석의 범람을 인식의 확장으로 여기는 오늘의 지성의 풍토가 그런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내처 물으신 마지막 물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알고 싶은 것을 알 수 있니?' 그리고 스스로 하신 말씀은 이랬습니다. '너와 그 사물 사이에 거리를 만들면 돼!' 흔한 말로 하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식은 사물을 객관화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인식객체와 공감할 수도 있고 감정이입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인식이 지향하는 종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감과 인식은 같지 않습니다. 그 둘은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결코 하나일 수 없습니다. 공감은 인식을 전제한 것일 때 훨씬 더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감도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어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리 만들기보다 거리 지우기에 더 몰입합니다. 상황적 긴박성이라는 규범을 당위적인 것으로 전제하면서 인식을 배제하는 과오를 범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인식을 위한 거리가 지워진, 그래서 인식을 결여한 채 공감과 감정이입의 커다란 기류에 휩싸여 흐르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분하고 재미없던 철학개론 시간의 여운이 왜 이렇게도 짙게 긴 울림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너는 무엇을 알 수 있니?' '너는 얼마나 알 수 있니?' '너는 어떻게 알 수 있니?'하는 물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인식론의 행방이 이렇게 묘연할 수가 없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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