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그냥
한바탕의 초록인데
틈 없는 한 장의 바다인데
나는 그 속에서
연두색 회색 흰색 파랑색
노랑색, 천 갈래로 흩어지는 색색깔을 만난다.
머리카락처럼 촘촘한
생명들에 둘러싸인다.
나는 그 안에서
달리고 냄새 맡고 넘어지고
살 찢어지고 피 흘린다.
멀리서 보면 그냥
한가로운 풀밭인데
풀들이 서로 뒤엉키고 꼬여
하얗게 말라 바스러져 간다.
● 멀리서 보면 그렇다, 모든 것은 평화스러운 그림이다. 한 색깔이다. 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모든 풍경 안으로 줌인을 하고 들어가면 채호기 시인의 시에 나오는 풀밭을 우리는 보게 된다. 수천의 생명이 수천의 다른 풍경을 만들고 있는 이 당연하면서도 희한한 광경.
어떤 사회든 각기 다른 목소리가 있기 마련이고 그 안에는 힘 센 목소리, 힘 약한 목소리,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아주 아주 작은 목소리도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깊이 낮게 들여다 보아야만 들리고 보이는 광경들. 그 안에서 저렇게 부대끼며 부비며 사는 한 인간에게,
그대는 풀밭의 한 일원이요, 라고 말하지 않고 그대는 풀밭을 이루고 있는 많은 생명 가운데 하나인 특별한 이요, 라고 사회가 말했으면 참 좋겠다. 단결하시요, 애국하시요, 라고 말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어주세요, 라고 사회가 그리고 권력이 말해준다면 참 좋겠다. 간신히 내는 목소리를 어떤 거대한 바람이 지우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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