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세계 경제를 짓눌러 온 것은 디플레 공포였다. 경기 침체 상황이 가속화하면서 물가와 자산가치가 장기간 하락하는 최악의 불황이 올 수 있다는 우려였다. 디플레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 이번엔 정 반대의 초(超) 인플레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쏟아진 경기 부양책의 후유증이 물가 폭등세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는 것.
물론 '현재 진행형'이라기보다 '미래 예고형'이라는 점에서 당장 정책적인 대응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게 중심이 경기와 고용에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서서히 물가 쪽으로 옮겨 갈 것이라는 데 이견은 많지 않다. 자칫 타이밍을 놓쳐 선제적 대처에 실패한다면,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인플레 경고의 선봉에 선 것은 국제기구 수장들이다.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8일(현지시각)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위기가 끝나면서 급격한 인플레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걱정된다"며 "(엄청나게 늘어난 유동성을) 어떻게 (순식간에) 흡수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했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 역시 "이제는 더 이상 경기 부양에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된다"며 "신용 경색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양만 이뤄지면 (몸에 나쁜) 당도만 높아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위르겐 슈타르크 집행이사도 가세했다. 그는 이날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유럽의 경기가 회복돼 인플레 조짐이 보이면 ECB가 초저금리 기조에서 즉각 벗어날 것"이라며 "경제가 더 이상 자유 낙하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외신들도 향후 닥쳐 올 인플레 재앙을 경고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9일자 '경기회복 가도에 지뢰가 널렸다'는 분석 기사를 통해 "인플레가 급격히 심화할 경우 빠른 금리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주택의 가치를 떨어뜨려 주식시장을 붕괴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미국의 금리 조기 인상설이 확산되는 모습이다. 시중은행 한 채권 딜러는 "최근 미 국채 금리가 급등하는 것도 미국이 인플레 기대 심리를 차단하기 위해 조기에 금리 인상을 단행할 거라는 설이 번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아직은 시기상조로 보이지만, 서서히 금리 인상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거꾸로 시간이 지날수록 인플레 우려가 조금씩 걷히고 있는 상황.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한국은행 목표 범위(2.5~3.5%) 내로 들어왔고, 생산자물가는 7년만에 하락세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또한 과잉 유동성 논란이 상당한 마당에 전 세계적인 인플레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송태정 우리금융지주 수석연구위원은 "시중에 과도하게 풀려있는 통화량이 결국에는 인플레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며 "당장은 아니겠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선제적인 대응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ytle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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