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 해방 후 한국사회의 흐름을 가른 분수령 가운데, 현재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1987년 6월항쟁이다. 5년 단임 대통령제의 헌정(제9차 개정헌법) 골격에서부터 시민사회 활성화, 문화적 다양성 확보 등 여러 변화가 6월항쟁의 산물이다.
그러나 22년이 지난 오늘, 87년 체제의 종언을 고하는 새로운 체제 담론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가 6월항쟁 22돌을 기념해 9일 개최한 '한국민주주의와 87년 체제'에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체제론'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새로운 시각들이 발표됐다.
■ '87년 체제'를 거쳐 '97년 체제'로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87년 체제는 헌정 체제 등 일부를 규정하는 개념으로서 아직 의미가 있지만, 한국사회를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사회체계로서는 의미가 소멸했다"고 단언했다. 그는 "87년에 상응하는 질적 전환점"으로 1997년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면화를 꼽았다.
손 교수는 '97년 체제'의 본질을 정치적 측면보다 "발전국가 해체와 신자유주의 전면화"에서 찾는다. 비정규직 주류화, 청년 실업, 사회적 양극화 등 "97년 이후 나타난 근본적 변화를 보고도 한국 사회가 아직 87년 체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색맹 사회과학'"에 다름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는 또 97년 체제를 넘어 '08년 체제'를 거론하는 일부의 시각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고 못박았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민주화를 넘어서 선진화'라는 의미에서 08년 체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정치 체제나 경제 체제에서 87년이나 97년과 같은 수준의 변화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 교수는 "오히려 현 정부 들어 (정치적) '재권위주의화'가 일어나고 있고 금산분리 완화, 출총제 폐지 등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는 97년 체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97년 체제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한국 민주주의가 온 길, 갈 길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민주주의의 후퇴, 민주적 성취의 역전"이라는 오늘의 현실로부터 87년 체제를 바라본다. 그는 87년 이후 정치의 특징을 '비 정당주의, 무 정당통치의 반복 등장'으로 규정했다. 집권당이 대통령당화했다가 급격히 탈대통령화하는 현상이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그 이유를 "87년 개정된 단임제 헌법과 88년 총선부터 고착화한 지역 정당체제의 충돌과 괴리"로 분석했다. 그는 또 87년 체제를 경제적ㆍ사회적 헤게모니의 민주화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정치와 시민사회만의 민주화에 그친 기형적ㆍ돌출적 민주화"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이런 87년 체제의 대안으로 "시장경제를 견제할 민주국가의 공공성 강화"를 첫번째로 꼽았다. "현재 OECD 평균의 6분의 1에 불과한 정부의 공적 지출ㆍ재분배 역할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사회 권력자원의 분산과 형평 없이 지탱가능한 사회가 없었다"며 "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도 한국 보수 정부와 세력의 '보수적' 지혜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87년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지적되는 단임제에 대해서도 그는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4년 중임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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