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이란 가진 재산도 없고, 그렇다고 담보나 신용능력도 없어 도저히 은행문턱을 넘을 수 없는 서민들에게 소액이나마 무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제도. 금융 소외자들의 자활과 창업을 위한 소액신용대출이다.
국내에선 금융권에서 잠자는 '주인없는 돈(휴면예금ㆍ보험금)'을 모아 '마이크로크레딧'에 지원하도록 지난해 3월 소액서민금융재단(휴면예금관리재단)이 출범했다. 그런데 출범 1년이 지난 지금, 일선 마이크로크레딧 사업 추진기관들은 "실제 지원이 처음 얘기와는 다르다"면서 재단측에 불평을 터뜨리고 있다. 재단이 처음 만들어질 땐 마이크로크레딧을 약속해놓고, 정작 지금 와선 정부재정이나 금융기관들이 자기 재원으로 해야 할 사업쪽에 돈을 주로 쓰고 있다는 지적이다.
취지 무색한 기금활용
9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재단은 소액금융사업예산으로 작년 271억, 올해 440억원을 배정했다. 그냥 봐선 꽤 많은 예산 같지만 실제 마이크로크레딧에 쓰인 액수는 각각 31억, 55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11~12%에 불과했다.
나머지 90%는 ▦신용불량자들을 위한 신용회복사업 ▦저소득층 아동들을 위한 소액보험 ▦사회적 기업 지원사업 등에 들어갔다. 하지만 신용회복사업의 경우 이미 캠코 재원이 들어가고 있고, 특히 소액보험사업은 보험사들이 자체 수익으로 해야 할 복지 사업인 만큼 소액서민금융재단 예산을 쓰는 게 타당하냐는 지적이 나온다. 애초의 재단설립 취지인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다른 사업들이 우선순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마이크로크레딧 지원예산의 조건도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다. 소액대출과 연계된 사전 창업컨설팅이나 사후관리 비용은 전혀 포함되지 않고 있으며, 재단은 오로지 자금회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크로크레딧 관계자는 "서민들이 소액신용대출을 받아 창업에 성공하려면 사전ㆍ사후관리를 제공해야 하는데 재단측은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그렇게 된다면 마이크로크레딧과 시중은행 대출이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재단이 은행처럼 대출금 회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정작 도움이 필요한 저신용자가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창업이 아닌 월세보증금 등으로 대출이 나가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말했다. 이 기관의 경우 올해 들어 5월까지 마이크로크레딧을 신청한 1,187명 중 실제 선정된 사람은 약 17%인 209명에 그쳤다.
자의적 지원기관 선정
지금까지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가장 왕성하게 벌여온 사회단체로 '사회연대은행'과 '신나는 조합'이 있다. 그러나 소액서민금융재단은 올해부터 특별한 이유없이 두 단체를 지원대상에서 제외했다. 두 단체는 재단 설립근거법(휴면예금관리재단의 설립 등에 관한 법률)의 모태가 된 기관으로, 우리나라에서 마이크로크레딧에 관한 한 가장 오랜 경험과 실적을 쌓아온 단체. 시민사회 등에선 두 단체가 제외된 이유에 대해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이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재단은 이들을 탈락시킨 대신 마이크로크레딧 경험이 거의 없는 법무부 산하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출소자 갱생기관)과 중소기업청 산하 소상공인진흥원 및 한 지역교회 재단을 지원대상에 추가했다. 재단설립 근거법안을 만든 김영환 국회보좌관(김현미 전 의원실 근무)은 "휴면예금관리법은 애초부터 사회연대은행과 같은 마이크로크레딧 전문 민간기관을 지원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관련 경험도 없으면서 정부재원을 받는 공공기관에 왜 재단 예산을 배정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불투명한 재원
마이크로크레딧 지원금이 적은 근본적 이유는 재원이 되는 휴면예금 및 휴면보험금을 금융기관으로부터 받아내기 어렵기 때문. 휴면예금ㆍ보험금은 법적으론 해당금융기관 수익(잡수익)으로 잡히기 때문에, 얼마를 출연하건 전적으로 금융기관 마음에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전체 휴면예금, 휴면보험금 규모도 알 길이 없다. 재단이나 주무기관인 금융위조차 휴면예금 규모를 집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올해 새로 출연할 휴면예금ㆍ보험금도 2월 말까지 확정돼 재단으로 넘어와야 했으나 일부 금융기관은 아직도 출연금을 내놓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금융위 관계자는 "지금까지 약 600억원 정도는 확정됐으나 전체 금융기관의 출연금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면서 "법규상 강제조항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원액수 자체가 너무 적다는 지적도 많다. 작년 출연금 2,701억원 중 서민들을 위해 실제 지원된 금액은 약 10% 정도. 재단 측은 "휴면예금ㆍ보험금 성격상 나중에 원래 예금주가 찾으러 올 경우를 대비해 유보금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재단 설립 후 3월까지 예금斂?찾아간 돈은 120억원 정도로 불과 5%도 안 된다. 김 보좌관은 "현 경제상황과 휴면예금 성격을 고려할 때 20% 정도만 남겨두고 모두 관련기관에 대출해줘도 충분하다"며 "재단이 서민에 돈을 더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휴면예금·보험금
휴면예금이란 은행 및 저축은행의 예금 중 관련 법률에 의거, 소멸시효가 지났지만 고객이 찾아가지 않은 예금. 휴면보험금은 보험계약 중 해지(실효) 또는 만기도래 후 관련법률에 의해 소멸시효가 지난 이후에도 찾아가지 않은 환급금 및보험금을 말한다. 휴면예금의 소멸시효는 은행예금 5년, 우체국예금 10년, 보험금은 2년이다. 2003년부터 2007년4월까지 쌓인 휴면예금은 1조587억원에 달한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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