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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진보가 대안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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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진보가 대안이 되려면

입력
2009.06.08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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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들 얘기와 자료를 종합해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말부터 '시민 민주주의'라는 의제를 붙잡고 줄곧 씨름했던 것 같다. 그의 관심과 지적 편력은 퇴임 후까지 지속돼 지난해 9월 마침내 '민주주의 2.0'이라는 토론사이트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노무현 사람들의 정치세력화 수순으로 비쳐 신ㆍ구 정권의 갈등과 반목을 심화시키는 모멘텀이 된 것은 익히 아는 바다.

노 전 대통령이 이 의제를 놓고 고민하고 궁리한 뜻과 배경은 17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던 2007년 10월 혁신 벤처기업인들을 대상으로 1시간 30분 넘게 열변을 토한 '진보적 시민 민주주의를 제안합니다'라는 주제의 특강에 잘 담겨 있다. 여기서 그는 재임 내내 좌ㆍ우 모두로부터 공격 받은 자신의 처지에 곤혹감을 표시하며 대화와 타협, 조정과 통합이 가능한 성숙한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노무현의 생전 화두 시민 민주주의

그는 반칙과 특권, 유착의 문화에 젖어 대결주의를 일삼는 보수세력을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행간 곳곳에서 진보도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암시를 깔고 있다. 시장 주도세력이 세상을 주도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추세라면, 이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반대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찾도록 민주주의, 즉 시민권력이 제대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시장권력과 시민권력의 융합 혹은 호의적 갈등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경제 살리기와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맹목적 선거슬로건으로 등장한 시기에 기업인들을 택해 이런 특강을 한 정치적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경제든 뭐든 결국 성숙한 정치, 책임있는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않으면 공염불이고 그것은 시민주권의 각성으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5년 집권의 반성과 성과로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으로 야기된 진보세력과의 불화를 아쉬워하며 진보세력이 국가를 관리해야 하는 자신의 고민을 이해하고 도와주지 않은 데 대한 서운함도 숨기지 않았다.

책임과 대안 강조한 뜻 잘 살펴야

이런 인식과 고민은 공개사이트인 '민주주의 2.0' 개설과정에도 줄곧 이어졌다. 그가 이 이름을 택하면서 개방-참여-공유라는 일반적 원칙 외에 책임과 대안을 특별히 강조한 이유다.

정보의 소유와 소통을 통해 생각이 바뀌고 그 생각이 운동이 되어 사회변화를 추동하고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토론이 아니라 사실과 논리를 근거로 함께 해답과 대안을 찾아나가는 토론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가니 결국 세상을 바꾸자면 국민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며 진보주의 문제 탐구를 위한 비공개 인터넷 카페를 만든 맥락과도 일맥상통한다.

국민과의 눈높이 정렬에 게으르고 종종 시대지체 증상마저 드러낸 진보를 보는 불만과 안타까움은 측근들에게 "진보진영이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비판만 한다" "시위대를 보면 여전히 80년대 보던 그 사람들"이라고 토로한 것에서도 잘 읽힌다. 파병과 비정규직 한미 FTA 등의 문제도 강퍅한 선악 이분법으로만 접근해 취약한 진보정권의 기반을 갉아먹고 시대적 가치를 구현하는 공감대를 무너뜨리는 우를 범했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을 짚어가면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을 계기로 진보진영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거론하고 나온 것은 왠지 어색하다. 모든 잘못과 파행을 비민주적 보수정권의 탓으로 돌릴 뿐, 어디에도 책임과 대안이라는 자성이 없다. 고인이 재임 중 몇 가지 정책에서 진보의 가치를 버렸다고, 혹은 정파적 이익에 맞지 않는다고 어느 순간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갑자기 노무현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들이 정말 고인의 유지를 존중한다면 10년 진보정권이 무려 500만 표 차이로 보수정권에 권력을 넘겨준 엄중한 책임을 살피고 방황하는 민심을 끌어올 실천적 대안을 깊이 성찰할 때다. 교과서적 거대담론과 그들만의 정의를 외치는 사이에 서민층의 삶은 더욱 궁핍해지기에 하는 말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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