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엔 성공과 좌절의 이야기(스토리)가 끊임없이 양산된다. 기업들에게는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찬스이고, 국가적으로도 순위를 대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런 관점에서 불황기는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반가워 해야 할 손님이다."
최근 A그룹의 한 최고경영자(CEO)가 한 말이다. 불황기를 예찬하는 듯한 그의 말은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CEO의 적극적 태도가 100년만에 한 번 올 법하다는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가장 빨리 극복하는 원동력중 하나가 됐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실제로 불황기는 CEO의 시험무대다. 살아남는 것이 기업의 가장 중요한 명제가 되는 때이지만 이러한 역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업계의 판도가 바뀐다. 유능한 CEO라면 평소 축적해온 역량과 리더십을 아낌없이 발휘할 기회다. 그야말로 CEO의 진정한 실력이 날로 드러나는 때다. 불황기를 거치며 한단계 더 도약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시장에서 사라지는 기업 역시 적지않다. 호황기엔 수요가 넉넉해 업계 1,2위가 아니라 하더라도 버티는 게 가능하지만 불황기엔 기업간 실력의 차이가 그대로 실적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경쟁력이 없는 한계 기업의 퇴출이 불가피한 게 불황기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대표기업들의 CEO는 이번 경기 침체기에 전례없는 실력들을 보여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아시아ㆍ태평양 지역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중국, 인도,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다른 신흥공업국에 비해 한국은 더 일찍, 보다 강하게 회복세에 접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17개 회원국의 올 1분기 국내총생산(GDP) 평균 성장률은 –2.1%로 OCED가 통계를 작성한 196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한국(0.1%)을 제외한 나머지 회원국은 모두 전분기 대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우리만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을 한 것이다. 이에 앞서 OECD는 경기선행지수(CLI) 보고서에서도 우리나라의 3월 CLI가 전달보다 2.2포인트 급등한 96.8로 개선됐다고 밝혔다. 이런 회복 폭은 회원국 가운데 최고치다.
세계 시장에서 우리 주력 수출품의 시장 점유율은 최근 오히려 증가세다. KOTRA에 따르면 중국 수입시장에서 한국 상품의 점유율은 지난해 9.9%에서 올 1분기 10.5%로 증가했다. 미국 시장에서도 지난해 한국 상품이 전체 수입 시장에서 차지한 비중이 2.3%였으나 올해(1,2월)는 2.8%로 0.5%포인트 증가했다. 경쟁국인 일본 상품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대역전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개별 기업들의 성적표도 깜짝 실적 그 자체였다. 한때 1조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 삼성전자는 오히려 1분기 4,700억원의 흑자(연결기준)를 냈다. LG전자도 1분기 12조8,530억원의 매출을 기록, 사상 최대 1분기 매출 기록을 세웠다. 1분기 현대차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4.7%로 지난해 같은 기간 보다 0.7%포인트 상승했다. SK에너지는 1분기 휘발유, 등유, 경유 등 3대 경질유의 수출물량을 전년 동기 대비 75%까지 늘렸다.
이처럼 우리나라 기업들이 강했던 이유는 정부의 선제적 대응과 환율 효과에도 힘 입은 바 크지만 한국 CEO의 창조적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종업원이 아무리 많아도 기업 실적은 결국 CEO의 자질에 좌우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특히 최근 한국 대표기업들이 창조형 CEO로 사령탑을 바꾼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창조형 CEO란 기존 사업과 고정관념에서 탈피, 신사업ㆍ신제품ㆍ신시장을 개척하는 창조적 의지와 역량을 갖춘 CEO다. 시장의 수요를 따라가기 급급하기 보다 오히려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는 CEO다.
그동안 적지않은 경영인들이 창조형 CEO를 역설했다. '창조경영'이야말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첫 출발. 과거엔 1등 기업 모방전략, 즉 공정개선, 비용절감 등에 주력하는 관리형 CEO의 리더십이 박수를 받았으나 이젠 더 이상 이런 방법으론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글로벌 경쟁의 심화와 경영 불확실성의 증대는 CEO의 덕목 중 새로운 가치와 시장을 창출할 줄 아는 창조 경영을 가장 절실하게 만들었다. 이는 또 단기 성과에 집착하고 개인 몸값 올리기에만 치중했던 부도덕한 CEO의 몰락이 가져온 반작용이기도 했다.
한국일보는 이에 창간 55주년을 기념, 우리나라 대표 기업 CEO의 불황기 리더십을 분석하고 평가했다. 불황기를 이겨내고 있는 한국 대표기업 CEO는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있는 지, 창조적 리더십은 현장에서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 지를 기업별로 살펴봤다. 또한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화한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빛을 낸 기업과 상품 브랜드를 종합적으로 살펴봤다.
최근 주식 시장 상승과 환율 안정 등을 바탕으로 경기 회복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아직 실물경제의 본격적인 국면 전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조형 CEO가 있고 불황에도 빛나는 기업과 상품이 있는 한 한국 기업들의 앞날엔 희망이 더 크다. 한국기업 힘내라, 한국 CEO 파이팅!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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