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창간55주년/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인터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창간55주년/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인터뷰

입력
2009.06.08 23:52
0 0

노무현 전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우리 사회의 진영 간-계층 간 갈등이 여과 없이 분출되고 있다. 북핵 사태, 지식인 시국선언 등 큰 일들도 도화선 타듯 잇따르고 있다. 사안들의 느닷없음 탓도 있겠지만, 공적 광장의 성급하고 감정적인 말과 행위들이 시민들의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의'겹눈의 사유'와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의 넓고 깊은 문화적 성찰이 절실한 때라 여겼다. 팽팽히 길항하며 엉버틴 힘의 자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듯한 두 원로 학자의 인터뷰를 나눠 싣는다.

인터뷰 내내 김우창 선생은 보편성과 합리성을 이야기했다. 윤리적 판단에 앞서 섬세하고 총체적인 이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무엇보다 구체적 현실을 일상 삶의 관점에서 판단하되 역사적ㆍ사회적 맥락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에게는 현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정말 객관적인 공론의 광장이 필요한 것 같아요." 2시간 가까이 인터뷰하는 동안 그는 강경한 단정(斷定)의 어미나 최상급 부사를 삼갔지만, 그 어떤 단정적 어조보다 힘차고 선명했다.

선생을 만나기 위해 이화학술원 연구실을 찾은 날은, 서울대교수 시국선언이 있던 날이었다. 선생도 1987년의 정치적 혹한기에 호헌철폐 교수 시국선언을 '주동', 유치장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이번 선언 어떻게 보셨습니까.

"내용을 자세히 몰라서…. 다만 '민주주의의 후퇴'를 말하기에 앞서 고려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가치 가운데 어떤 것이 후퇴했다는 구체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야 합니다. 또 교수들이 집단행동을 할 만큼 '후퇴의 위기'가 심각한가도 판단해야 하죠.

그러므로 (교수선언도, 그에 대한 판단도)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모든 사안에 대해 모든 사람의 의도가 중시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령 환자를 볼 때는 의사의 판단이 중요하죠. 대신 의사는 인간 존중의 관점을 유지해야 합니다. 모든 이가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하죠.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선생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투명성이고, 투명성의 최대 함정 가운데 하나가 공직자 부패라는 얘기도 했다. "박연차 씨와 부적절하게 관련된 여러 공직자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이것도 '민주주의의 위기'죠. 물론 '애도'가 우선이니, 지금 그것을 거론할 단계는 아니겠지만…." 중립의 가치도 강조했다. "전장의 적십자 활동을 보죠.

그들에게도 국적이 있고, 전쟁 자체나 쌍방에 대한 판단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참고 중립을 지킴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탱하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그 같은 중립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입장이 다 없어진 것처럼 보여요."

말의 맥락이 어쩔 수 없이 '대립' '폄하' '무례'따위로 이어졌다. 2002년 고려대 정년퇴임 기념 좌담(<행동과 사유> , 생각의 나무)에서 행위와 책임의 문제를 언급하며 이성적 고찰, 선택, 관용과 용서 그리고 인간성의 보편적 실현에 대한 커미트먼트(commitment)를 위축시키는 경향을 두고 선생은 '사고(思考) 없는 행동주의'라 비판한 바 있다.

-제대로 알기도 전에 감정에 휩쓸려 편을 가르고 삿대질하는 경향을 염두에 둔 말씀이신지.

"생각의 세계는 행동의 세계보다 넓습니다. 지적 모험은 무한해도 좋지만 행동은 신중해야 하죠. 우리 사회는 너무 양분화돼 있고, 다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세상 같아요. '보편'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출발해서 자아를 넘어서야 성립합니다. 완벽한 보편, 객관이 가능하냐는 문제는 있겠지만, 우리 사회는 그게 정말 약해진 것 같아요."

-너무 신중하다 보면 아예 '행동'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을 텐데요.

"물론 행동은 빨라도 부담스럽고, 느려도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죠. 그래서 행동적 선택에는 늘 부담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전체적인 상황을 봐야겠죠."

가급적 우회하려던 길이 다시 '상황'으로, 구체적인 현실로 이어졌다.

-경찰 차량에 갇힌 '서울광장'의 상징에서 뭔가를 읽을 수는 없을까요.

"소통의 문제가 자주 거론되는데, 우선 소통이란 공적인 광장에서 공적인 문제에 대해 일정한 질서에 따라 발언하는 거죠. 그리고 현실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국회라는 공적 기구가 있습니다. 광장에서의 함성은 정권 타도 등 '반대'의 표현은 가능하겠지만 건설적 정책화는 불가능합니다.

복지가 필요하다면 국회로 하여금 제대로 기능하게 해서 입법절차를 거쳐 제도화해야지요. 우리 사회에는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있는데…, 불가능해요. 좌파-우파의 소통도 그래요. 당신이 틀렸다고 하기보다는 당신 말대로 하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를 얘기해야 합니다. 수학 문제가 아닌데 옳고 그름을 누가 어떻게 판단하겠어요?"

-너무 당위론적인 말씀 같습니다. 건강한 대의기구로서의 국회를 전제하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무조건 광장으로 나가는 건 안 됩니다. 또 소통의 문제보다 우리의 삶에서 더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장 빈부격차, 실직자문제, 남북문제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사회적 약자 문제도 '선언' 주체들이 제기한 주요 이슈인데요.

"'약자'라는 표현도 문젭니다. 그 말은 투쟁의 함성이 될 순 있지만, 소통의 언어는 아니죠. 구체적으로 실직자, 빈부격차라고 말해야 한다고 봐요. 지식인들이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난 유보적 입장입니다.

지식인은 지식인의 입장을 대변하죠. 모든 계층의 입장이나 의견을 대표하는 것처럼 얘기하면 안 돼요. 최근 신문들을 보면 우익단체들의 광고가 자주 실리는데 요지는 '민족 정통성을 지키자'는 거예요. 마치 자기네가 정통성을 독점한 것처럼 얘기합니다. 소통은커녕 싸움을 거는 겁니다."

-현 정부의 성장위주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그것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분배가 중요하지만 성장의 범위 안에서 분배할 도리밖에 없잖아요.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하죠. 잠정적으로는 좋든 싫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우리는 사정이 좀 낫지만 외국에서는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있잖아요. 사회적 의미에서도 기업을 도와주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은 따라가자는 말씀?

"전 지난 선거 때 이명박 씨를 안 찍었어요. 최근에 황석영 씨 일을 두고 논란이 있던데, 일전에 그 사람을 만났더니 청와대에서 '그런' 얘기를 한다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도와드리라고 말했어요. 이 정부가 잘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혁명을 할 거라면, 협조할 필요 없고, 선거가 임박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죠. 하지만 다른 선택이 없다면 도와야지요. 만나서 최소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얘기라도 해야 해요."

선생은 노태우 정부 시절 목포시 개발계획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프로젝트의 제목으로 그가 제안한 것이 '아껴놓은 땅'이다. 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대응에도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반론적인 비판은 무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계적 경제체제 속에서 어떻게 인간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죠. 가령 비정규직 양산이 불가피하다면 그 한계 안에서 최소한으로 양산되도록 대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독일 사민당 당수를 지낸 좌파 정치인 헬무트 슈미트 전 수상의 최근 신문 기고문을 펼쳐 보였다. 글의 제목은 '성장 없는 성취는 없다'. "이런 것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건설적 논의의 예가 되겠죠. 현실적 미래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하지 않으면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이 사회에, 그리고 지식인 사회에 바라는 바를 들려달라고 하자 선생은 다시 '사실 존중'을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좋은 놈- 나쁜 놈, 내 편-네 편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의 어떤 결정이 우리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기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사실과 의견을 나누되, 의견도 동기나 과거지향적이기보다 미래 삶의 지향에 입각해야 합니다."

■ 김우창(金禹昌)

선생은 들려준 얘기 중 일부는 기사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사적(私的)인 얘기이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지만, 도덕적 염결성에 대한 집요함으로도 읽혔다.

# 그는 20년 가량 된 '엑셀'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운행 중 멈춰 견인된 적이 있긴 하지만 별로 불편하지는 않다고 했다. 선생은 "검소해서나 소박해서가 아니라 새 차가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드러진 '지식자본가'로서의 상징적 후광이 있어 가능한 일 아니냐"고 모질게 물었더니, "그렇게 말하는 친구도 있는데 그럴 땐 '아마 그런 면도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며 웃었다. 웃더니 잠시 양복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이 양복도 그래요. 아, 오늘은 좀 좋은 건데(이 대목에서는 선생의 보편ㆍ객관성이 현저히 흔들렸다) 내가 입고 다니는 양복 중 많은 게 우리 아버지 거예요. 그냥 편하고 좋아서죠. 새 옷도 좋지만, 사려면 고르느라 골치 아프잖아요. 그게 싫으니까…."

# 성장 없는 경제가 용인되려면 현재보다 생활수준을 낮춰 살 각오가 필요하다는 얘기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선생은 지금보다 좀 덜 쓰고 사는 일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더라도 아주 점진적으로 가야 한다고, 급격히 진행되면 큰 소동이 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자가 내면과 외면의 조화에 대해, 바깥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만 좇는 세태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말하자, 선생은 "자신에게 충실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 보기에 흉하면 그것도 안 좋고, 또 내가 나를 꾸미면 내 기분도 좋아질 수도 있고…" 이내 '보편과 합리'의 옷깃을 여몄다.

# "살면서 몇 차례 정부 일을 도운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판공비 카드를 줍디다만 단 한 번도 써본 일이 없어요. 공적인 일에 관계된 사람과 식사라도 하면 그 카드를 쓰는 게 원칙이죠. 카드를 안 썼다는 얘기는 일을 안 했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그런데 카드를 쓰다 보면 동창들 밥 사는 데서 꺼낼 수도 있고, 또 내가 안 꺼내도 동창들이 기대를 하기도 하고…."

# 우리 사회의 느슨한 공적 윤리규범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적은 금액이야 가끔은 사적으로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살짝은 흐트러지는 게 인간적인 것 아니냐"고 어기대자 "물론 그 경우를 비판하는 건 매정한 일이죠. 그래도 어떤 공적 질서에서나 중요한 것은 도덕적 엄정성이에요"라 말했다. "친구랑 미국에 간 적이 있는데, 그 친구의 친구가 미국무성 관리였어요. 함께 식사를 했는데 그 관리가 기어코 계산을 합디다. 물었더니 미국무성 규정이 그렇다더군요. 그게 공적 윤리죠. 우리 사회는 그게 부족해요. 그 점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도 연구해야 합니다."

▲ 1937년 전남 함평

▲ 서울대 영문, 코넬대 영문학 석사, 하버드대 미국문명사 박사

▲ 고려대 영문과 교수ㆍ대학원장, 일본 도쿄대 교환교수, 이화여대 석좌교수(현), 프랑크푸르트국제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장

▲ 서울문화예술평론상, 팔봉비평문학상, 대산문학상, 백상출판문화상 저작상, 녹조근정훈장(2003)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poe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