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한국 언론산업의 선구자였다. 한국일보의 55년 역사는 곧 지난 반세기 한국 언론계가 걸어온 역사이다. 한국일보는 언론계를 선도한 각종 최초의 기록을 자랑하며, 한국 언론사에 새로운 획을 그어 왔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나라 전체가 암울한 혼란과 실의에 빠져 있던 1954년 6월 9일, <한국일보> 가 창간됐다. 백상 장기영 발행인과 창간 언론인들은 민주언론과 공정언론을 강조하면서 한국 최초의 '상업주의 신문'을 표방, <한국일보> 의 창간은 신문업계에는 건전한 경쟁을 유발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일보> 한국일보>
한국일보는 창간 1년 만에 5만부, 64년엔 무려 30만부의 발행부수를 넘어섰다. 68년 2월 본사 4층 목조사옥(서울 종로구 중학동 14)이 전소하는 대화재가 발생해 신문제작 시설이 잿더미로 변하는 시련도 겪었지만, 한국일보의 윤전기는 멈춰서지 않았다. 한국일보는 창간 29년 만인 83년 국내 최다 발행부수(160만부)를 돌파하며'1등 신문'의 자리를 지켰다.
한국일보는 다양한 전문 일간지의 시대도 열었다. 60년7월17일최초의 어린이신문인 <소년한국일보> , 60년 8월 1일 최초의 종합경제지 <서울경제신문> (80년 언론통폐합 때 강제폐간했다가 88년 복간됨), 69년 9월 26일에는 최초의 스포츠전문일간지 <일간스포츠> 를 창간했다. 일간스포츠> 서울경제신문> 소년한국일보>
앞서 54년 4월 국내 최초의 영자일간지<코리아타임스> 를 인수, 한국일보사는 종합지-스포츠지-경제지-영자지-소년지의 자매지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일찍이 다양한 분야의 뉴스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코리아타임스>
64년 9월 27일에는 시사주간지 <주간한국> 을 창간, 주간지 시대도 개막했다. 고국 소식에 목말라하던 재외동포를 위해 69년 6월 9일 창간한 <미주한국일보> 도 한국인이 미국 현지에서 제작한 최초의 종합일간지로 기록됐다. 미주한국일보> 주간한국>
언론인 선발의 전형을 제시한 것도 한국일보다. 창간 한 달 만인 54년 7월 견습기자 6명을 공채 선발, 한국언론계에 견습기자 공채제도를 정착시켰다. 창간 이후 '기자사관학교'로 불리며 수많은 언론계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던 뿌리도 견습기자 공채제도에 있다. 한국일보의 견습기자 공채는 지금까지 67기에 걸쳐 1,000여명의 기자를 배출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무한 경쟁에 돌입한 언론 환경하에서도 한국일보는 신문의 미래를 이끌어 왔다. 월요일자 발행, 전국 동시 인쇄체제 구축, 조·석간제 발행, 납활자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제작시스템(CTS)로 전환, 점자신문 도입등새로운 언론 환경 하에서 신문의 역사를 고쳐 썼다.
우선 89년 7월 월요일자 발행을 단행함으로써 59년이후 28년 만에'쉬지 않는 신문' 시대를 다시 열었다. 8개월 뒤 조선일보가 월요판을 발행하는 등 다른 일간지들도 일제히 뒤따랐다. 91년8월에는 경남 창원 공장을 가동해 서울과 같은 새벽 시간대에 현지에서 인쇄한 신문을 배포하는'전국 동시인쇄 체제'도 언론사 중 최초로 실행했다.
91년 12월부터는 '조·석간제 발행'에 돌입, 2년간 24시간 뉴스 속보 체제를 가동했다. 한국일보는 또 93년9월 전면 CTS인쇄를 시작, 신문의 상징이었던 납활자시대를 최초로 마감하고 컴퓨터 시대를 여는 등 신문제작의 기술 혁신도 선도해 왔다. 1999년 선보인 <함께사는 사회, 함께 읽는 신문> 은 세계 최초로 시도한 점자신문이었다. 함께사는>
문향란 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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