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태왕사신기'와 '이산'을 기점으로 우리 TV 사극의 대중적인 인기 추세는 수그러들었다. 블록버스터 영화에 버금가는 대형 자본('태왕사신기'는 편당 15억원 이상), 현대극을 압도하는 화려한 복색(이병훈 감독의 '대장금'이후 굳어진 트렌드), 사극 인기스타 전형의 탈피('불멸의 이순신'의 김명민)로 탄탄한 입지를 굳혔던 사극.
하지만 지루한 스토리 전개와 어설픈 퓨전형식 때문에 실패가 이어졌던 지난해 이후 지상파 방송 3사의 대표 사극('자명고', '대왕세종', '돌아온 일지매' 등) 시청률은 10% 중반도 버거울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 4회까지 방송된 MBC 월화 사극 '선덕여왕'이 이미 20%가 넘는 시청률을 보이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TNS미디어코리아에 따르면 '선덕여왕' 3회의 시청률은 수도권 기준으로 23.3%를 기록했다.
2003년 '대장금'이 3회 만에 20.8%를 달성하고 이후 50%가 넘는 파워를 보였다는 점에서 MBC는 "사극의 붐이 되살아났다"며 반색하고 있다. '선덕여왕'이 선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선한 얼굴의 고현정 '허를 찌르다'
'미실' 역의 고현정은 1990년대 중반 SBS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마주했던 다소곳하고 여성적인 '혜린'의 이미지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결혼 이후의 공백기를 보내고 돌아온 그의 작품들도 '모래시계'를 연상케 하는 '봄날', 코믹하지만 역시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똘똘 뭉친 '여우야 뭐하니' 등 일색으로 '고현정은 항상 순수한 여성 역할을 맡는다'는 공식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하물며 형사를 연기했던 '히트'에서도 고현정은 끈덕진 과거의 사랑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착한 여인의 상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선덕여왕'에서 이전과 너무나 다른 캐릭터의 고현정을 접하고 만다. 부하의 목을 베며 튀는 선혈을 뒤집어쓰면서도 태연히 웃어 보이는 미실은 그동안 선한 모습의 캐릭터에 잠겨 있던 고현정의 잠재력을 끄집어냈다. 시청자는 이런 모습에 상쾌한 파격을 느끼고, 이는 두드러진 시청률로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굳어졌던 캐릭터를 탈피한 주연의 활약으로 높은 시청률을 달성한 드라마는 많다. 뻔한 불륜 드라마의 코드를 지녔음에도 2007년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가 대표적인 케이스.
1990년대 초반 '아들과 딸'로 형성된 묵묵한 한국적 여성의 캐릭터인 김희애는 이 드라마에서 독하디 독한 연기를 해냄으로써 시청자의 허를 찌르는 효과를 거뒀고 이는 드라마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20%대 중반의 시청률로 아침을 들썩이는 MBC '하얀 거짓말'도 '국민 어머니'의 이미지를 털고 표독스러운 연기를 선보인 김해숙의 덕을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단순한 악역보다 시청자의 허를 찌르는 선한 얼굴의 악역 연기자가 인기 드라마의 주요 비결인 셈.
■ 시청자를 붙드는 '미션 릴레이'
'선덕여왕'의 기분좋은 스타트는 시청자가 이해하기 쉬운 간결한 선악 구도를 초반부터 명쾌하게 그려줬다는 점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사극은 기본적으로 어렵다. 현대극이 아니어서 시청자는 역사적 배경을 습득하느라 머리를 굴려야 하며 학창시절 기억을 끄집어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사극 시청자는 인물간 갈등구조가 복잡하게 얽히는 것을 꺼린다.
왜적, 간신배와 싸우는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 운명과 맞서는 장금이('대장금') 등에서처럼, '선덕여왕'의 덕만공주(이후 선덕여왕)가 정적 미실과 정면대결하는 간단한 흑백구도는 시청자에겐 편하고 부담스럽지 않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김영현 작가가 과거 '대장금'을 쓸 때처럼 대중을 쉽게 스토리로 이끄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며 "회마다 시청자가 몰입할 만한 미션들을 주인공이 풀어나가는 장면을 넣는 것도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김용의 무협소설 <의천도룡기> 이후 아시아 영웅 이야기의 전형이 된 소위 '무림고수 탄생 스토리'(절벽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은인을 만나 16년 뒤 고수가 되어 강호에 등장한다는 이야기 구조)가 '선덕여왕'에서 세련되게 적용됐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의천도룡기>
쌍생아로 태어나 왕궁으로부터 버려진 덕만공주가 서역을 떠돌다 15년여가 지난 후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을 단편적으로 풀지 않고, 중간중간 정적인 미실이 더욱 힘을 키우는 모습을 비중있게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는 이야기에 더 몰입하며, 동시에 덕만공주에 감정적으로 쉽게 동화되는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는 분석이다.
양홍주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