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졸업 이후 줄곧 대기업 계열사에서 우편물 분리ㆍ배달 업무를 해온 하모(54)씨는 최근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비정규직법)에 따라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7월을 앞두고 회사가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비록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비정규직이지만 '대기업 직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일해온 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하씨는 "오십 넘어서 새로 무슨 일을 하겠나. 비정규직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직장에서 쫓아내는 법"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비정규직 고용기간 제한규정 시행이 임박하면서 2년 이상 장기 근속한 비정규직들을 중심으로 계약 해지가 속출, 대량 실업사태가 우려되고 있다.
충남 서산의 D오토에서 일해온 근로자 80명은 지난달 26, 27일 해고 예고통보를 받았다. 이들은 D사와 도급계약을 맺고 일했는데, 통보서에는 "6월30일로 도급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해고될 것이니 양해 바란다"는 내용만 간략하게 써 있었다.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공기관에서도 비정규직은 경영효율화 등 갖가지 명목으로 해고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 전국 1만714개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은 14만명. 한 공기업 인사 담당자는 "정부의 개혁 방침에 따라 정규직마저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7월 이후 사용기간 2년을 넘는 비정규직은 100%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 공기업에서 일하는 김모(48)씨도 "근무하는 부서에서 비정규직 17명이 6월30일로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는데 회사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면서 "고용기간 2년 연장 등 보완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회사측이 계약을 해지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대학병원에서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며 3년째 간호사로 근무하는 김모(29ㆍ여)씨는 계약만료를 4개월 앞두고 해고 통지를 받았다. '정규직 간호사는 필요 없다'는 병원 방침이 너무 확고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한때는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 나도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으나, 현실은 너무 냉정하다"고 울먹였다.
기업측도 할 말은 있다. 한 기업의 인사 담당자는 "운전, 청소, 사무보조 등 단순 업무직은 2년 넘는다고 일을 훨씬 잘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이윤 창출이 우선인 기업 입장에서는 되도록이면 채용과 해고가 쉬운 비정규직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량 계약 해지가 비정규직 일자리 감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자동차 부품업체 관계자는 "계약을 해지한 비정규직 사무보조원을 새로 뽑는 대신, 정규직들이 업무를 나눠 맡았다"며 "다른 업체들 상황도 비슷하다"고 전했다.
반면 일부 대형 금융기관과 유통업체에서는 법 취지대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외환은행이 11일 계약직 직원 430명 가운데 100명을 사실상의 정규직인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비롯해 하나, 신한, 우리은행 등도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또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은 정규직 또는 무기 계약직으로의 전환을 마쳤다.
이대혁 기자
■ 근로감독관이 본 현장은 "하소연·문의 빗발… 폭풍전야"
5일 서울 서초구 방배3동 서울지방노동청 산하 강남지청 6층 근로감독과 사무실. 근로감독관들은 근로자와 마주 앉아 상담하거나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감독관은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 여부는 언제 결정되느냐는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고 말했다.
박모 감독관은 요즘 상황을 "폭풍전야"라고 표현했다. 그는 "기간이 연장되지 않으면 계약 해지가 줄을 이을 것이고, 이들이 새 일자리를 찾기까지 짧게는 1개월에서 4,5개월 넘게 실업자로 지내야 할 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날 인천 남동구 경인지방노동청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조모 감독관은 "지난해 말부터 호텔, 중소 규모 마트, 소규모 전자부품 제조업체 등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계약 갱신을 하지 않는 업체들이 나오고 있다"면서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지 않거나 정규직 전환에 따른 지원이 없으면 대부분 사업장들이 비정규직을 해고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울청 동부지청의 윤모 감독관은 "국회가 연장 가부를 빨리 결정해야 사업장들이 안정을 찾는다"고 지적했다. 경인청의 정모 감독관은 "지금부터 논의해도 결정까지 공백기간이 상당할 텐데 그동안 직장을 잃는 비정규직이 속출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경인청 수원지청의 권모 감독관은 그나마 있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줄어들 것을 염려했다. 최모 감독관도 "비정규직 신규 채용은 거의 없다"면서 "비정규직을 다 내보내고 정규직만으로 사업장을 운영하겠다는 업주들도 많다"고 전했다. 조모 감독관은 "마흔에 어디서 새 일자리를 찾느냐는 항변 전화가 쏟아지고 있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한 감독관은 "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일부 감독관은 실업자 급증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인천청 정모 감독관은 "경기가 회복되면서 올 하반기에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원년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 양측 주장 여전히 평행선
7월 이후 비정규직 사용기간 제한의 여파와 관련, 정부와 노동계의 예측은 큰 격차를 보인다.
노동부는 현행 법이 그대로 시행되면 7월부터 올 연말까지 최대 100만명의 비정규직이 일시적으로라도 실업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노동부 관계자는 "5인 이상 사업체의 비정규직 263만명 가운데 7월부터 연말까지 근무기간이 2년을 넘는 사람은 약 97만명"이라며 "계약 해지 후 상당수가 재취업을 하겠지만 일시적으로라도 수십만명이 실업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노동계는 "정부 추계는 과장"이라며 당장 7월에 고용불안 위험에 놓이는 비정규직은 2만명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이는 지난해 8월 현재 '근속기간 13개월'인 비정규직이 4만명이었고, 이중 올 7월까지 자리를 지킬 비율이 50%라고 가정해 추정한 것. 노동계는 8월 이후에도 정부가 주장하는 대량 실업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당연히 양측이 내놓는 보완 대책의 방향도 크게 엇갈린다.
정부는 이미 정규직 전환 근속기간을 현재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현행 법이 그대로 시행되면 대량 실업 사태가 예상되는 만큼 하루빨리 법을 개정해 발등의 불을 꺼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동계는 '법 시행 유보는 절대로 안된다'는 입장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정부가 앞서 4년 연장 가능성을 제시,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당초 정규직 전환을 검토 중이던 기업조차도 계획을 철회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동계는 또 기업들의 정규직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재정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3월 근속기간 연장안과 함께 ▦사회보험료 2년간 50% 지원(연간 75만원) ▦차별시정 기간 6개월로 연장 등의 정규직 전환 지원책을 내놓았지만 그 정도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노동조합에 차별시정권 부여 ▦정규직 전환지원금 지급(연간 528만원) 등을 요구하고 있다.
조철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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