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50년 9월 입대했다. 6ㆍ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그가 편안히 살고 있던 제주까지 가만 두지 않았다. 당시 서른 살이던 그는 부인과 두 아들을 두고 전장으로 떠났고, 간단한 훈련을 마친 뒤 국군 2사단에 배속됐다.
51년 1월 중공군은 그야말로 물밀듯이 몰아쳤다. 2사단은 중공군의 3차 신정공세에 밀려 경기 가평 지역에서 처절히 싸웠고, 그는 포로가 됐다.
2007년 7월 25일 강원 화천군 봉오리 가동교 인근에서 유해가 발굴됐다. 북한군이 51년 철수하면서 국군 포로와 노무자들을 집단 학살했다는 제보에 따라 군이 발굴 작업을 벌인 끝에 찾은 것이었다. M1 탄피와 버클, 단추, 옷핀 등이 함께 발견됐다. 하지만 유해의 신원을 확인할 만한 단서는 없었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2007년 12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김공준(62ㆍ제주 북제주군 한경면)씨가 찾아왔다. "아버지를 찾고 싶습니다."
유해발굴감식단은 등록된 유가족들의 유전자와 발굴 유해를 일일이 대조하는 힘겨운 작업 끝에 5일 화천에서 발굴된 유해가 김씨의 아버지 고 김상희 일병임을 확인했다.
고 김 일병과 결혼 후 60여년을 홀로 지내온 부인 김상화(89)씨는 "너무 오랜 세월 마음 한 구석에 한으로 남았는데,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 김 일병의 유해는 이달 중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이와 함께 올해 3월 경북 포항 기북면 무명 380고지 부근에서 발굴된 유해가 50년 8월 수도사단 낙동강 전투에서 17연대 2대대 8중대장으로 활약했던 고 고희경(육사 8기ㆍ당시 30세) 중위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군은 전투기록과 함께 유품 등을 분석해 신원을 확인한 뒤 그를 대위로 1계급 추서했다.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6ㆍ25 전사자 발굴 유해 중 가장 높은 계급이다. 감식단은 "그의 직계 유가족을 아직 찾지 못했다"며 "친척이 계시면 반드시 발굴단으로 연락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한 한국군 6ㆍ25 전사자는 13만여명에 달한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지금까지 총 2,897구를 찾았으며 이 중 신원을 확인한 것은 46구에 불과하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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