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의 자금 중개기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정부와 통화당국이 지난해 경제위기 이후 엄청난 돈을 살포했지만, 돈이 얼마나 빠르게 도는지를 보여주는 통화유통속도는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다.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을 총통화(M2, 현금+요구불예금+저축성 예금)로 나눈 통화유통속도는 0.687로, 한국은행이 통계를 작성한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은행들이 고객예금을 바탕으로 얼마나 통화를 창출했는지 보여주는 통화승수도 뚝 떨어졌다.
정부가 올해 29조원의 슈퍼추경을 편성하고, 한은이 기준금리 인하와 구조조정펀드 조성 등을 통해 돈을 퍼부어도 시중자금이 금융권에서만 맴도는 머니게임 양상은 거의 개선되지 않고 있다. 800조원이 넘는 부동자금은 증시의 단기 급등과 수도권 부동산투기 조장 등 불건전한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반면 중소기업 등 실물부문은 금융권의 대출 기피로 자금을 못 구해 부도 위기에 몰리는 등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통화유통속도의 급락은 은행들의 대출 조이기와 모럴 해저드가 가장 큰 원인이다. 정부는 신용경색 해소와 중기대출 확대를 위해 지난해 하반기 이후 외채지급 보증, 국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확충 지원, 중기 대출 보증 전액 만기 연장 등 각종 당근을 제공했다.
하지만 중소기업 대출 증가율은 지난 4월 3조2,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때(10조9,000억원)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은행권이 국민세금을 담보로 혜택을 잔뜩 받고는 기업 대출을 기피하는 등 자금중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경영여건이 불확실하자 기업들이 벌어들인 돈을 유보금으로 쌓아두고 있는 것도 통화 유통속도가 급락한 또 다른 요인이다.
정부는 부동자금이 실물부문으로 흘러가게 하는 종합적 출구전략(exit plan)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부실기업 등 옥석을 가리는 구조조정의 속도를 내는 게 관건이다. 그래야 신용경색이 해소되고, 통화유통속도도 개선될 것이다. 대기업 유보금이 투자로 연결되도록 세제 지원과 규제 완화에도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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