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레이놀즈 지음ㆍ이종인 옮김/책과함께 발행ㆍ688쪽ㆍ2만9,000원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지구에는 대량살상무기(WMD)라는 유령이 수시로 출몰하고 있다. 공포의 실체이기도 하면서 강력한 저주의 메시지이기도 한 그 악령을 물리치기 위한 '퇴마 의식'에 언론은 '정상 회담'이라는 푯말을 달아 준다. 첨단 커뮤니케이션의 발달 덕에 실제적 회합이란 폐기 직전의 유물처럼 느껴지게 된 이 시대, 각국의 수뇌급 인사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장차의 전략을 논하는 자리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 최근 북핵 문제로 와서는 6자회담 등 실무자 차원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 궁극은 정상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돼 있다.
그같은 고도의 외교 행위 속에 숨은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정상 회담은 어떻게 계획ㆍ실행되며, 그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문서보관소 등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그 테이블의 협상과 흥정을 둘러싼 인자들을 샅샅이 뒤져내는 책 <정상 회담> 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역사의 변곡점을 형성한 정상 회담을 개별적으로 분석ㆍ전망한 글은 더러 있었지만, 20세기를 움직였던 6차례의 정상 회담을 총체적으로 분석ㆍ전망한 책은 없었다. 정상>
"두 번의 열전과 한 번의 냉전, 그리고 전쟁 상태의 해소"(607쪽)로 요약되는 100여년 세월의 요지가 6차례의 정상 회담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지도자들 간의 만남을 강조하는 개인적 회담, 전문 보좌관들이 동석한 전체적 회담, 다양한 차원의 실무적 회담이 동반되는 발전적 회담 등 다양한 차원의 대화가 공존해 이야기를 더욱 풍성히 한다.
케임브리지대 국제역사학과 교수인 저자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기원전부터 지도자들의 외교적 담판 현장을 개관, 진정한 정상 회담의 의미를 찾아간다. 현대적 정상 회담의 시작으로 보는 1919년 파리평화회의나 이듬해의 로카르노 회담은 '우발적인 정상 회담'에 불과하다.
항공기 여행, 대량살상무기의 등장, 미디어에 의한 대대적 보도 등 3박자를 골고루 갖춘 현대적 정상 회담의 효시는 1938년 뮌헨 회담(체임벌린-히틀러)이다. 영국 수상 처칠이 '정상'(summit)이라는 단어를 외교 용어로 맨 처음 썼던 계기이기도 했다.
히틀러 체제를 연장시킨 결과만 초래한 얄타 회담(처칠-루스벨트-스탈린, 1945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부른 빈 회담(케네디-흐루쇼프, 1961년) 등 저자는 역사가 주는 교훈을 겸허하게 수용한다. 데탕트 정책의 출발을 알린 모스크바 회담(브레즈네프-닉슨, 1972년), 지도자와 보좌관들 사이에 훌륭한 팀워크가 이뤄져 냉전 종식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제네바 회담(고르바초프-레이건, 1985년) 등은 정상 회담이 순기능을 발휘한 경우다.
정상 회담이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제로섬 게임이자 고차원의 심리 게임이다. 상대방으로부터 강요를 받으면서 자신의 양보선을 밝혀야 하는데 그 시점을 파악하기 어렵다. 저자는 그를 두고 "뇌의 작용만큼이나 직관적"(595쪽)이라고 썼다. 이 책의 특장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도는 그 현장을 개관적 사실에 의거, 마치 눈 앞에 두고 보는 것처럼 재구성했다는 데 있다.
저자의 강의 내용을 기본 텍스트로 한 이 책은 '인간화된 외교'에 초점을 맞춰 사회과학 서적이 갖게 마련인 딱딱함을 극복했다. 학생들에게 정상의 역할을 하나씩 맡겨 간단한 상황극을 펼쳐가며 명료한 이해에 다다르게 한 접근방식 덕택이다. 정상들 간에 오갔을 대화를 마치 대본처럼 재현한 본문 덕에 일반 독자들은 외교 현장의 수사학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체감할 수 있다. 이 책을 근거로 제작ㆍ방영된 BBC의 다큐멘터리에도 호평이 따랐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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