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10시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한 고시원. 3.3㎡(약 1평) 남짓한 방은 책장이 달린 책상 하나와 길이 180㎝가 채 안되는 작은 침대만으로도 비좁았다.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곳. 얇은 합판으로 만들어진 벽을 통해 옆방 사람의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이날 내ㆍ외국인 10여명과 함께 고시촌 탐방에 나선 일본인 문화기획자 이토 타케시씨는 여닫이식 책장 문 틈에 낀 휴지조각을 발견하고 의아해 했다. 방 주인이 문을 여닫을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끼워놓은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그는 "한국 청년들이 작은 것에는 정말 많이 신경을 쓰는데, 삶의 목표나 의미 같은 큰 것에는 무심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탐방에 참가한 대학생 박재용(25)씨는 고시촌 젊은이들의 현실에 대해 더욱 적나라한 목소리를 냈다. "서로 숨죽이며 살다 보니, 어느새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않게 돼요. 자기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아~'하는 소리를 내는 사람도 가끔 있는데, 고시원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죠."
한 명씩 나뉘어 사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독립되지 않은 고시원을 일러 "불확실한 미래에 저당 잡혀 젊음이 질식 당하는 적막의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서울시립직업체험 센터인 하자센터와 서울시대안교육센터가 '2009 서울청소년 창의서밋'의 한 행사로 4,5일 1박2일의 노량진 고시촌 투어를 진행했다.
150여개의 학원이 밀집해 7~9급 공무원 시험과 임용고시 등 각종 시험 준비생들이 하루 10만여명씩 모여 드는 노량진 고시촌. 이 곳에 투영된 한국 청년들의 현실을 날 것 그대로 살피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기획된 이색 투어에는 이토씨를 비롯해 데스몬 호이 홍콩대 건축학과 교수 등 외국인 4명,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와 대학생 등 내국인 9명이 참가했다.
4일 밤 이들 일행이 고시원을 나와 마주친 노량진 거리는 학원을 마치고 독서실과 스터디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무거운 가방과 두터운 책을 끼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학생들 뒤로는 술집, 노래방 등의 네온사인이 현란하게 반짝였다.
호이 교수가 "학원과 유흥업소가 함께 밀집해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말하자, 대학생 윤한다씨는 "공원이나 다른 휴식 공간이 없다 보니, 수험생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집과 게임방을 찾는다"며 "극도로 억압된 욕구를 풀기 위해 더 자극적인 방법을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 탐방 장소는 독서실이었다. 입구에 붙은 '발꿈치 들고 다니기'라는 경고 문구 대로, 참가자들은 발끝으로 걸으며 독서실 내부를 둘러봤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책상들에는 '경찰학 개론' '한국사' '핵심문제풀이' 등 수험서들이 가득했고, 30여장의 메모지가 빼곡히 붙어 있는 책상도 보였다.
탐방객들은 이날 밤 고시원의 좁고 불편한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이튿날 오전 7시부터 시작된 학원 수업에 참가한 뒤 대낮의 고시촌을 둘러 본 일행은 노량진의 한 호프집에서 소감을 나눴다. 호프집은 밤에는 술집이지만, 낮에는 스터디 장소로 이용된다. 노량진 고시촌에는 지역 특성을 감안해 이렇게 운영되는 업소가 적지 않다.
고시촌에 대해 20대 한국 청년들은 할 말이 많았다. 고시공부를 3년간 했다는 김지연(28ㆍ여)씨는 "고시촌은 잠시 머물다 가는, 탈출을 목표로 하는 공간이어서 무작정 참고 견디자는 생각 뿐이었다"고 했다.
윤한다씨는 "'잠만 자는데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창문 없는 방에서 3개월간 지냈는데, 잠을 자다가도 숨이 막혀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며 "수험생들이 한계점까지 내몰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고시촌의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최소한의 주거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조한혜정 교수는 "공원 하나 없는 삭막한 이 공간을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일본의 청년취업 지원 사회단체 이사장인 쿠도 케이씨는 "한국의 미래가 이 작은 방에서 결정될 수도 있다"며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이들 위한 여유 공간 및 상담 시설이 우선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호이 교수는 "홍콩에도 케이지 홈(cage home)이라는 쪽방촌이 있는데 저소득층이 몰려 슬럼화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생활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축가이자 문화기획자인 오카베 토모히코씨는 "여기에 실험적인 예술가들이 모여 살게 해 마을을 꾸미고, 저렴한 주변 숙박환경과 편리한 교통을 잘 이용한다면 돈 없는 외국 청년들이 묵을 수 있는 관광 타운으로 발전시키는 것도 아이디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