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34년 전 그랬듯 징소리가 극장 안을 가득 메웠다. 연출가 이병훈씨가 무대에 올라 옛 명동 국립극장의 풍습을 재현하며 징을 울린 데는,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뜻과 명동이 문화중심지로 되살아나길 바라는 연극인들의 염원이 함께 담겨 있었다. 징소리에 이어진 5인조 퓨전국악밴드의 '도라지타령'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현대적인 바이올린 선율에 가야금, 장구 소리가 중첩됐다. 감격에 찬 듯 터져나오는 관객의 우렁찬 박수를 가른 것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등장한 맹진사(신구)였다. "얘! 아무도 없느냐, 아무도 없어?"
명동 국립극장을 복원한 명동예술극장(극장장 구자흥)이 연극 '맹진사댁 경사'(작 오영진ㆍ연출 이병훈)의 개막과 함께 5일 정식 개관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신홍순 예술의전당 사장, 이종덕 성남아트센터 사장, 연극인 이순재 강부자 박웅 정동환 손진책 김의경씨를 비롯해 '34년 만의 재개관'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문화예술인들로 552석의 극장 객석은 빼곡히 찼다.
공연에 앞서 열린 개관식은 명동예술극장의 재개관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연극인들만의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 시민 300여명이 운집해 극장 앞에서 진행된 테이프커팅을 지켜봤다.
사회자 김성녀씨, 인사말을 한 이방주 명동ㆍ정동극장 이사장, 축사를 한 유 장관과 김수용 예술원 회장 등의 목소리는 모두 톤이 높았고, 때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맹진사댁 경사'는 혼례가 극 전체에 흐르는 사건인 까닭에 명동예술극장 개관 잔치의 흥을 돋울 축하 작품으로 선정됐다. 1944년 초연된 이 연극은 전통 결혼 풍속을 소재로 인간의 허위를 꼬집는 희극성이 강한 작품이다. 연극뿐 아니라 무용, 창극, 영화로도 꾸준히 소개됐으며 1969년에 국립극장, 즉 이날 개관한 명동예술극장에서도 공연됐다.
켜켜이 쌓인 작품의 나이테를 반영하듯 1969년 300원이던 '맹진사댁 경사'의 관람료는 4만원이 됐지만, 그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했다. 탐욕스러운 맹진사가 외동딸 갑분(장영남)을 명문가에 시집 보내려다 제 꾀에 넘어가 몸종 입분(송인성)만 좋은 일 시키고 만다는 권선징악의 스토리는 결혼이 비즈니스처럼 돼 버린 요즘 관객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오래된 희곡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현대적 의상과 무대도 눈에 띄었다. 이유숙씨가 맡은 의상은 화려한 색감을 자랑했고 한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세트 뒤로 은은하게 흐르는 영상은 수채화 같은 그림을 만들었다.
신구(新舊)의 조화가 느껴지는 부분은 또 있었다. 80대 중반의 배우 장민호씨의 목소리는 쟁쟁했고, 30대 배우 장영남씨의 능청스러운 10대 연기에도 관객의 반응은 컸다. 2막에선 영화 '맹진사댁 경사'(1962)에서 입분 역을 맡았던 83세의 노배우 최은희씨가 마을 노파로 깜짝 등장했다.
개연성과 필연성이 부족한 희곡의 태생적 배경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노배우들까지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까운 과장된 연기를 선보이는 등 우화적 느낌을 살려 몰입하기에 무리는 없었다. 그야말로 한바탕 잔치를 벌이는 세련된 마당극에 가까워 연령층에 관계 없이 함께 즐길 만한 공연이다. 21일까지. 1644-2003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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