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계의 시선은 지금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니스를 향해 있다. 현대미술의 방향을 제시하는 세계 최고의 미술축제인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7일(현지시간) 공식 개막, 자르디니 공원과 19세기의 조선소 자리인 아르세날레에서 11월 22일까지 5개월여 동안 이어진다.
스웨덴 출신 기획자 다니엘 번바움(46)이 총감독을 맡아 '세상 만들기'(Making Worlds)라는 주제로 본전시를 꾸몄고, 세계 77개국이 국가관을 설치했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는 "창조의 과정을 보여주고 우리 주변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번바움의 말처럼 미술 그 자체, 그리고 개인적 경험에 토대한 공간성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설치미술이 주를 이룬 가운데 회화, 사진, 영상, 조각 등 다채로운 현대미술 장르가 눈 앞에 펼쳐졌다. 원로 거장들을 대거 참여시켜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52회 때에 비해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 작가들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 공간성을 탐구하다
자르디니 공원에 들어서면 흰 기둥 위로 '비엔날레'라는 문구가 쓰인 본전시장이 보인다. 일본 작가 오노 요코와 함께 이번 비엔날레에서 평생업적 부문 황금사자상을 받은 미국 개념미술가 존 발데사리의 '바다와 하늘'이 이 건물의 전면을 장식했다.
건물 내부에서 처음 만나는 흰 방은 '세상 만들기'라는 주제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아르헨티나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가 검정색 줄을 거미줄처럼 꼬아 공간을 메웠는데, 그 줄들이 만나 곳곳에서 둥근 구를 이룬다.
이어지는 검은 방은 31세의 스웨덴 작가 나탈리 뒤버그가 설치한 기괴한 느낌의 인공 정원과 그 속에서 상영되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됐다.
성과 관련된 온갖 엽기적 상상력을 담은 이 공간은 특히 높은 인기를 누렸고, 뒤버그에게는 젊은 작가에게 주는 은사자상이 돌아갔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은 독일 조각가 토비아스 레베르거가 받았다.
아르세날레의 본전시장은 브라질 작가 리지아 파페의 설치물로 시작한다. 바닥에 온갖 잡동사니를 늘어놓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천장에 그물을 치고 박스를 올려놓기도 했다. 오래된 조선소의 흙빛 벽면은 그 자체로 영상물의 스크린이 됐다가, 회화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야외 정원도 현대미술 전시장이 됐다.
미술작품인지 자연인지 헷갈릴 만큼 본래 경관을 살린 가운데 이뤄진 작가들의 개입은 독특한 결과물을 낳았다. 넝쿨로 뒤덮인 정원 속 헛간 안에는 미국의 세계적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가 매달아놓은 200개의 체조 링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51회 때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았던 김선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어두움과 밝음을 대비시키고, 정원을 전시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등 공간적 특징을 잘 살렸다"면서 "번바움 총감독이 평소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작가들을 불러 상당히 짜임새 있게 전시를 꾸몄다"고 평했다.
■ 돋보인 한국 작가들
52회 본전시에는 한국 작가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올해는 90명의 본전시 참여 작가 명단에 유럽에서 활동하는 여성 설치미술가 구정아(42), 양혜규(38)씨가 이름을 올렸다. 구씨는 2점의 설치작을 자르디니와 아르세날레의 야외 공간에 각각 놓았다.
아르세날레에서는 표지판도 없는 미로 같은 정원을 돌고 또 돌아가면 구씨가 만든 커다란 나무둥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나무려니 착각하고 지나치려 할 때쯤 사람의 존재를 알아챈 나무둥치가 부르르 몸을 떨며 반응한다.
자르디니 공원에는 본전시장 바로 앞 잔디밭에 구씨의 이름이 적혀있다. 도대체 작품이 어디 있는지 알기 어렵다. 자세히 보면 바닥 군데군데 풀 사이로 수백 개의 커다란 큐빅이 박혀 햇빛을 만날 때마다 반짝이고 있다.
의도적으로 발견하기 어렵게 만든 그의 작품은 관람객들의 힘겨운 여정까지 포함하고 있기에 오히려 더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구씨는 평소 사진을 찍을 때도 자신을 향해 플래시를 터트려 얼굴을 감추는 작가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대표 작가이기도 한 양혜규씨는 아르세날레 본전시장에 7점의 '광원(光源) 조각'을 내놨다.
사적인 경험과 공간을 다양한 감각으로 풀어내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양씨는 빨래건조대와 옷을 거는 행거에 온갖 부엌용품, 고무호스, 블라인드 등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 사이를 통과하는 백열전구의 빛은 관람랙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 치열한 국가관 경쟁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은 각국이 문화적 자존심을 걸고 벌이는 경연장인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관은 네온, 밀랍, 브론즈, 물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개념미술가 브루스 나우만의 작품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국가관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1993년 백남준을 대표 작가로 내보냈던 독일은 영국 작가 리암 길릭의 개인전을 열었다. 검은 텐트로 건물을 덮은 일본관은 여성의 가슴을 극도로 변형시킨 미와 야나기의 대형 흑백사진으로 꾸며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눈길을 끌기 위한 전략도 다양했다. 영국관은 당일 아침에 예약을 해야 관람할 수 있도록 해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많았고, 프랑스관의 경우 1회 관람객 수를 20명으로 제한해 종일 줄이 늘어서기도 했다.
뉴욕 뉴뮤지엄 큐레이터인 재미동포 주은지씨가 커미셔너를 맡아 양혜규씨의 개인전으로 꾸민 한국관은 공간과 작품의 조화가 뛰어나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현장을 방문한 미술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그간 한국관이 젊은 작가 소개에 집중해온 만큼, 미국의 경우처럼 이미 국제적 명성을 획득한 작가를 내세워 수상을 노리는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베니스=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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