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4월6일, 샌디 웨일이 이끄는 시티코프와 존 리드가 이끄는 트래블러스가 합병했다. 바야흐로 상업은행, 투자은행, 브로커리지, 보험, 신용카드 등 거의 모든 금융 분야를 씨티그룹의 우산 아래 두는 금융 공룡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전세계 금융계에 '메가뱅크' 바람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한 씨티그룹의 자산은 2007년 말 세계 최대인 2조1,867억달러(약 2,700조원). 그러나 11년이 지난 지금 시티그룹은 정부로부터 450억달러(약 55조원)의 구제금융을 수혈 받는 대신 40% 가까운 지분을 정부에 넘김으로써 사실상 국유화됐다. 결국 2일에는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 종목에서 퇴출되는 굴욕까지 당했다.
■ 위기의 근본 원인은 10년 전 합병
씨티그룹의 몰락은 극적이지만, 사실 그 씨앗은 98년의 합병에서 잉태됐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합병 당시 미국은 은행업과 증권업을 철저히 분리하는 글래스-스티걸 법이 아직 유효한 상태였다.
대공황에서 교훈을 얻어 은행이 고객의 예금으로 위험한 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규제였으나, 씨티그룹의 합병 선언으로 도마에 올랐다.
씨티그룹이 리처드 루빈 전 재무장관을 이사회에 영입한 99년, 미 의회는 글램-리치-브릴리 법을 만들어 글래스-스티걸 법을 사실상 폐기했고 씨티그룹은 은행ㆍ보험ㆍ증권업을 한데 모은 '금융 슈퍼마켓' 전략을 내세워 세계 최대 자산을 지닌 금융회사로 성장했다.
이후 미 금융권에 대규모 합병 바람이 불면서 뱅크오브아메리카, JP모건체이스 등 금융의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메가뱅크가 속속 생겨났다.
그러나 합병 이면에는 관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씨티코프와 트래블러스의 합병 후 웨일과 리드 공동회장 간 주도권 다툼은 상당 기간 계속됐고 최고경영진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양사의 '화학적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직이 너무 비대해 경영진에서 미세 관리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리드 전 공동회장은 지난해 4월 "탄생 자체가 실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씨티그룹은 올해 1월 회사를 씨티코프와 씨티홀딩스로 분리해 11년 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미 독립했던 보험사 트래블러스는 다우지수에서 씨티그룹이 퇴출되고 남은 빈 자리를 꿰찼다. '대마불사'를 믿었지만 오히려 너무 커서 실패했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 리스크 관리 실패
씨티그룹이 무너진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리스크 관리 소홀이다. 경영진이 위험자산 투자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수익성이 높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증권 투자에 올인하다 금융위기의 가해자 겸 피해자가 된 것이다.
씨티그룹 경영진이 리스크 관리에 소홀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천문학적 성과급이었다. 주당 순이익이 늘어날수록 성과급은 풍선처럼 늘어났고, 가장 위험한 자산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을 A등급으로 둔갑시켜 유동화한 구조화증권은 최고의 수익원이었다.
이렇게 위험한 투자 덕분에 씨티그룹의 순이익은 2004년 170억달러에서 2005년 245억달러, 2006년 215억달러로 늘어났다.
찰스 프린스 당시 회장의 연봉도 2004년 1,000만달러에서 2006년 2,600만달러(현재 환율 기준 약 320억원)로 급증했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시작되면서 부실 자산에 대한 대규모 상각이 시작됐고, 2007년 36억달러로 쪼그라든 순이익은 지난해 277억 적자로 돌아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처음으로 가시화한 2007년 7월, 프린스 회장은 인터뷰에서 "음악이 계속 연주되는 한 일어서서 춤을 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달 한국을 방문, 강연하면서 "리스크를 측정, 관리할 수 있다는 수학적 모형과 신용평가사들의 등급을 맹신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후회했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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