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이 칼럼에 살짝 등장한 지평막걸리에 대해 여러 지인들이 궁금해했다. 금요일자 신문에서 내 원고를 읽은 친구들은 주말에 막걸리 사다 마시자고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지평막걸리를 만드는 지평리의 도가는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몇 년 전 전통주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지평리뿐 아니라, 또 막걸리 도가 뿐 아니라 대한민국 구석구석에는 아직도 그 시절 그 자리, 옛날 방법대로 술을 만들고 있는 양조장이 여럿 남아 있다. 하지만 술 빚는 기술을 이어갈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고, 전통주를 찾는 수요가 꾸준하지 못해 문을 닫는 곳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 현실이다.
나라에서도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고, 다른 문화권의 입맛들이 한국 음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금, 적지 않은 숫자의 우리 술 장인들은 경영난을 겪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 와인과 사케
세계적으로 가치가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 와인을 보자. 와인이 금값처럼 꾸준한 상승을 이뤄낸 배경에는 프랑스 음식이 있다. 프랑스 음식은 국물이 많지 않으니, '반주'를 곁들이기에 좋다. 딱 맞게 익혀서 먹을 만큼 썰어 접시에 올린 오리고기나 양고기는 손톱만큼씩 둘러진 소스에 찍어 먹는다.
오물오물 씹다 보면 수분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때 한 모금 흘려 넣어주는 와인은 딱 '가뭄에 단비'다. 이렇게 프랑스 음식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와인이 있어 왔다.
최근 몇 년간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일본 술 '사케'를 보면, '프랑스 음식에는 프랑스 와인'의 공식을 참고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뉴욕이나 런던 등에 있는 유명한 일본식 레스토랑에서는 '와인 리스트'만큼 두툼한 '사케 리스트'를 만나볼 수 있다. 이런 대도시에서 인기를 끄는 동양 음식점들은 서양인의 입맛에 맞는 요소를 가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래의 맛은 간직하되, 접시에 담는 방법이나 먹는 방법(젓가락 대신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도록 만든 생선 술찜이나 갈비 양념의 스테이크가 그 예) 등을 변형한다. 본래 국물이 자작하게 있는 요리라면 국물만 수프의 형태로 소량을 내고, 건더기는 따로 내서 포크와 나이프로 먹게 만든다.
날생선을 못 먹는 일부 서양인들을 위해 살짝 익힌 쇠고기 한 점을 밥과 함께 꼭 쥐어 만드는 '스테이크 스시', 새우튀김을 가운데 놓고 김밥처럼 꼭꼭 말아 썰어 내는 '덴푸라 롤' 등은 모두 반주 한 잔을 곁들이게 만드는 메뉴들이다.
새우튀김을 넣어 말아낸 초밥을 씹던 런더너(Londoner;런던인)가, 뉴요커(Newyorker)가 파리지앵(Parisian)이 주류 리스트를 물어올 때, 자연스레 사케를 권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 마르셰 오 뱅
보르도와 더불어 프랑스의 양대 와인 산지인 부르고뉴의 중심 '본(Beaune)' 마을에는 와인 홍보관이라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 '와인장터'라는 뜻의 '마르셰 오 뱅'에 가면 부르고뉴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을 시음하고, 공부할 수 있다.
입장료를 내면 와인을 시음할 잔을 주는데, 건물을 새로 올려 만든 것이 아니라 몇 백 년 전부터 있던 지하 와인 저장고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멋지다. 와인은 주기적으로 종류가 바뀐다. 두 번, 세 번을 방문해도 같은 와인을 마실 경우가 드물다는 얘기다.
어둡고 서늘한 와인 저장고에 들어서면, 프랑스인들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도 상당수 눈에 띈다. 얼핏 모양만 봐서는 절대로 맛을 알 길이 없는 남의 나라 술을 그것도 열 종류가 넘게 직접 마셔볼 수 있으니 부르고뉴의 필수 관광 코스다. 관광객들의 호응은 시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둑한 지하에서 천천히 맛을 본 와인을 일일이 적어서 갖고 다니며 직접 와이너리를 찾거나 시내 와인 가게에서 구매를 한다. 대부분의 와인은 마르셰 오 뱅에서 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르고뉴에 여행 온 관광객들이 달팽이 요리나 쇠고기 와인 스튜를 먹으며 어떤 와인을 곁들여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틈에 와인 공부를 시켜버린다는 점이다. 공부한 와인은 구매로 이어진다.
와인 메이커들이 열심히 와인을 만들고, 좋은 와인들이 모여 한 공간에서 홍보를 펼치는 좋은 경쟁의 장이다. 몇 번이고 집중해서 직접 와인 맛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 달팽이가 지닌 땅 냄새와 버터 풍미, 허브 향기에 가장 어울리는 화이트 와인을 찾아 낼 수 있고, 와인에 재웠다가 푹 익혀내는 쇠고기 스튜에 어울리는 진한 레드 와인을 찾아낼 수 있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책이나 인터넷에는 '전문가들이 권하는'과 같은 제목의 정보들이 가득하여 무슨 음식에는 무슨 와인, 이런 음식에는 저런 와인이라 말하지만 사실 입맛이란 것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내 입으로 마셔가며 찾아낸 궁합이 더 유용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와인에 흥미를 붙인 관광객들은 집으로 돌아가서도 좋은 추억과 향기로운 맛으로 와인을 기억하게 되니 와인을 만若?이들로서는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겠다.
'동향 출신'이라는 말은 음식과 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비슷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음식과 술은 같은 물줄기로 만들어졌고, 같은 토양에 누워 자라서 그 맛의 바닥이 서로 맞닿는다. 한식과 와인의 매치가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그보다 먼저 할 일은 '우리 술 챙기기'라는 생각이 든다.
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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