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韓屋)의 멋에 매료돼 35년을 한옥에서만 살아온 외국인이 서울시를 상대로 한 긴 소송 끝에 철거 위기에 처했던 40여 채의 한옥을 지켜냈다. 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한국 사람들에게조차 점점 외면당하고 있는 전통 한옥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주인공은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64)씨다.
■ 법원 "재개발계획 취소하라"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부장 성지용)는 4일 바돌로뮤씨 등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6가 주민 20명이 서울시를 상대로 "동선 제3주택재개발정비구역 지정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 지역 정비대상 건축물 중 노후ㆍ불량 건축물의 비율은 58.75%"라며 "이는 관련 조례에서 정한 기준 비율 60%에 미달하므로 이 지역에 대한 주택재개발정비구역 지정 처분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앞서 바돌로뮤씨 등은 "재개발구역 지정을 위해서는 20년 넘은 노후ㆍ불량 주택 비율이 60%를 넘어야 하는데, 행정 당국이 세부 조사도 하지않고 60.73%라는 결과를 내는 등 추진 절차에 하자가 있다"며 2007년 12월 소송을 냈다.
아직 상급심의 판단이 남아있지만 서울행정법원의 판결로 일단 동소문6가 일대에 대한 서울시의 재개발 계획 추진은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 푸른 눈 외국인의 한옥사랑
바돌로뮤씨는 능숙한 한국어로 한옥과의 첫 인연을 돌이켰다. 스물세살이던 1968년,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한국에 온 뒤 강원 강릉시의 고택 선교장(船橋莊)에서 지내며 한옥의 매력에 푹 빠졌다. 74년 서울로 이사 온 그는 성북구 동소문동 한옥에 터를 잡고 지금껏 그곳에서 살았다.
바돌로뮤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옥의 매력은 바로 '자연 친화적'이라는 점이었다. 콘크리트나 철근 등 인공 자재가 아닌 흙과 나무 등 자연 소재로 만들어져 안에 사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바돌로뮤씨는 직선 위주의 서양 건축물과 다른 외형적 곡선미, 문살ㆍ기와 등의 독특한 무늬도 한옥의 장점으로 들었다. 결국 한옥은 주거 공간이면서 자연 친화적 소재로 지은 예술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바돌로뮤씨의 한옥에 위기가 닥친 것은 2007년. 서울시는 그의 집을 포함한 인근 164개 동의 건축물을 주택재개발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35년간 공들여 가꾼 집이 국가의 무신경한 결정으로 철거될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행동에 나섰다.
행정소송을 위해 관련 법규를 공부하고 능숙한 한국어로 서울시 등에 공문을 보냈다. 이웃 주민들을 상대로 한옥 보존 확인서에 서명을 받으러 다리품도 팔았다. 당사자가 많은 소송이라 1년7개월에 걸친 재판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승소했다. 재판에 참석하느라 중요한 계약을 놓치기도 했다는 바돌로뮤씨의 남다른 한옥 사랑은 결국 결실을 거뒀다.
■ 집에 대한 꿈, 정부가 간섭할 수 없어
이번 법원 판결로 그 어떤 집과도 바꾸지 않을 한옥을 지킬 수 있게 된 바돌로뮤씨는 "기분이 좋습니다. 주장을 받아들여 준 법원에 감사합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재개발에 찬성하는 주민들로부터 '외국인의 욕심 때문에 재개발 사업을 망쳐 한국인들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항의를 받았던 일을 떠올리기도 했다. 동소문동 인근 '아리랑 고개' 일대에서 진행 중인 재개발계획에도 유감을 나타냈다. "한국의 대표민요가 아리랑 아닙니까? 코리아=아리랑인데…."
일단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승소하는 것이 목표지만, 소송과 별도로 그에게는 큰 소망이 있다. 바돌로뮤씨는 동소문동과 돈암동 일대를 교육과 전통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이 일대에는 대학 등 교육기관이 많아서 교육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데, 미아리고개 쪽의 무속촌 등 전통문화 요소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두 가지 요소가 어울리는 거리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집에 대한 각자의 꿈이 있는데, 정부가 강제로 간섭하고 욕심을 가져선 안 되죠." 바돌로뮤씨는 재개발 광풍을 등에 업은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도시재정비 계획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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