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만 해도 별다른 놀이가 없어 자리만 있으면 두 친구 무릎에 줄을 걸어두고 고무줄넘기를 하며 놀았다. 그때 우리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원한이여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스러져간 전우여 잘 자라."와 같이 결의에 가득 찬 군가를 부르며 고무줄을 넘었다. 시절이 수상하였으니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라고 온전했을 리 없다.
대통령을 찬미하고 고마워하는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을 넘기도 했다. 그 노래의 후렴구는 이렇다 "고마우신 우리 대통령 ○○○ 대통령/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다 자라서 그 노래가 특정 대통령을 위한 찬가로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씁쓸했다. 아이 시절 뜻도 모르고 공연히 길이길이 대통령의 이름이 빛날 것이라고 노래했던 게 억울했다. 누군가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가 아이들과 국민들이 익힌 세뇌된 노랫말로 생겨날 리 없을 텐데, 그런 식으로 국민의 감사와 칭송을 받았다며 안도했을 과거의 정권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안쓰럽게 느껴질 만큼, 대통령은 도대체가 고마운 사람이 아니었다.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지만 노래를 불러 이름을 빛내고 싶은 대통령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대통령에 대해서는 애당초 희망도 기대도 하지 않았고, 어떤 대통령에 대해서는 임기가 끝나기 만을 기다리며 체념하고 무관심했다. 권력에만 눈이 먼 모습을 볼 때면 씁쓸하고 화가 난 나머지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본래 가장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계약직 공무원이 맡는 자리라고 매도해 버렸다.
지난 금요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에 다녀왔다. 노란 풍선이 그 분께 미처 전하지 못한 미안함과 감사 인사처럼 창공을 날았다. 노제를 치르면서도 보낼 수 없는 마음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팔목에, 머리에 노란 리본으로 묶였다. 그분을 보내기 싫은 인파에 밀려 더디게, 더디게 운구차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시민들이 연호하는 그분의 이름과 이름조차 부를 수 없을 만큼 복받쳐 터뜨리는 울음소리가 수북이 쌓였다.
나는 영정 속의 대통령에게서 대통령이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선량한 국민들에게 고마운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분에게서 알았다. 그분 때문에 국민이 대통령이 되어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국민이 대통령을 빛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국민을 빛나게 해 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억지로 지어 부른 찬가를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들과 함께 마음을 담은 노래를 합창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붉어진 눈시울로, 떨리는 목소리로 그분이 즐겨 부르시던 '사랑으로'라는 노래를 다 함께 기꺼이 불렀다. 그분이 부르시던 '상록수'를 힘껏 따라 불렀다.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고 하던 대통령을,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리라'고 하던 대통령을 잃었다.
그분의 이름을 넣어 '길이길이 빛나오리다'라고, 어린 시절에는 뜻도 모르고 부르며 엉뚱한 이를 찬사했던 노래를, 진심을 담아 불러 드리고 싶지만, 이름을 넣어 부르려니 목이 멘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가슴이 아파서 대통령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부디 평안히 영면하시기를 바란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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