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30년간 낙태를 시술해온 의사가 낙태 반대론자로 추정되는 용의자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낙태가 미국 내 이념 논쟁의 핵으로 떠오를 조짐이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언론은 캔자스주 위치타에서 틸러여성병원을 운영하던 조지 틸러(67)가 31일 교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중 한 백인 남성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경찰에 잡힌 용의자는 스콧 뢰더라는 이름의 51세 남성이다.
정확한 범행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낙태 반대 단체인 '오퍼레이션 레스큐'의 트로이 뉴만 회장은 NYT에 "뢰더가 우리 단체와 연관됐다는 의견이 있다. 그가 우리의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정식 관계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틸러의 병원은 임신 21주차 이후에도 낙태를 시술하는 미국 내 3개 병원 중 하나다.
에릭 홀더 법무장관은 유사 범죄가 추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면서 "(낙태 의사 등 보호를 위해) 정부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틸러는 낙태 반대자의 손에 살해된 4번째 희생자이자 21세기 들어 첫 희생자다. 특히 1990년대는 낙태 지지자와 반대자의 폭력적 대립이 첨예해 1993년에서 98년 사이 3명의 낙태 시술 의사가 살해됐다. 틸러 역시 90년대 이후 지속적인 위협에 노출돼 그의 병원, 집, 교회 밖에서 수시로 반대 시위가 열렸으며 병원에 폭탄이 터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양 팔에 총격을 받기도 했다.
낙태 반대 운동가들이 다시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과 소냐 소토마요르 대법관 지명을 계기로 낙태 규제가 완화될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 운동 당시 "낙태는 부분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때문에 지난 달 가톨릭계인 인디애나주 노틀담 대학의 졸업 축사를 하면서 학생들의 거센 반대 시위에 부딪히기도 했다. 낙태 반대론자 사이에서는 소토마요르 지명이 향후 관련 소송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낙태반대단체인 '생명을 위한 미국인의 연대'는 "소토마요르는 대법원을 국립 낙태통제본부로 만들려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내 여론은 오랫동안 낙태 찬성에 기울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낙태 반대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지난달 7~10일 사이 실시한 갤럽의 여론조사 결과 역사상 처음으로 낙태에 반대하는 국민(51%)이 낙태에 찬성하는 국민(42%)을 앞질렀다. 지난해 조사 당시는 44%(반대) 대 50%(찬성)이였다.
미국에서 낙태는 동성결혼, 줄기세포연구 등과 함께 진보, 보수를 가르는 윤리 의식의 척도로 여겨진다.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했던 미국에서는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사건에서 대법원이 강간으로 임신한 원고의 낙태 허용 요구에 손을 들어주면서 부분적 낙태가 허용되었다. 낙태 지지자들은 여성들의 선택을 중요시한다는 의미에서 선택지지(pro-choice), 반대론자는 태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에서 생명지지(pro-life)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대립해 왔다.
최지향 기자 jh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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