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1~1952)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기여한 바는 결정적이지 않다. 그녀가 혁명 러시아(나 그 뒤의 소련)에서 맡았던 정치적 역할도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러시아혁명 또는 혁명 러시아와 관련해 가장 널리 거론되는 여성 가운데 하나다. 이름이 실체를 넘어선 경우라 할 수 있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콜론타이는, 혁명 러시아나 소련의 권력 핵심부에선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당대 여성으로선 독특한 이력을 걸었다. 우선 그녀는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었다. 물론 그녀 이전에도 재(在)외국 공관에 여성을 파견한 나라는 있었겠지만, 그 수장으로서는 아니었다.
콜론타이는 노르웨이와 멕시코에서 소련 공사를 지냈고, 스웨덴에서 소련 공사와 대사를 지냈다. 혁명정부의 첫 사회복지 인민위원을 지냈고 1919년에는 세계 최초로 여성부를 창설해 이끌었지만, 1920년대 이후 그녀의 일터는 거의 외국이었다.
그녀 시대에 사람들은 외교를 남자의 일로 여겼다. 그것은 정치를 남자의 일로 여긴 것과 비슷하다. 외교는 국경을 넘어선 정치고, 가장 세련된 형태의 정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의 비속함과 잔혹함을 벗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외교는 번잡한 프로토콜 속에, 화사한 연미복 속에, 강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국가의지를 감추고 있다.
그런 외교의 일선에 여성이 나섰으니, 세상의 눈길을 끌 만했다. 아버지가 제정러시아의 장군이었고 어머니가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상 딸이었던 덕에, 콜론타이는 훌륭한 교육(좌파들이 '부르주아 교육'이라고 경멸하는)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교육은 그녀의 외교관 생활에 도움이 됐을 게 분명하다.
콜론타이는 또 혁명 초기에 노동조합의 역할을 두고 레닌을 비롯한 당의 남성 지도자들과 대립했다. 남성 지도자들은 혁명 이후의 노조를 공산주의 훈련소로 여겼고, 따라서 국가기관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노조가 경제를 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담한 당내 좌파 '노동자의 반대' 그룹은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중요시했다. 레닌이 '노동자의 반대' 그룹을 해산한 뒤, 콜론타이는 권력핵심에서 더 멀리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당 핵심부의 독선에 대한 비판을 콜론타이는 계속 이어나갔다. 스탈린이 집권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시무시한 1930년대 '모스크바 재판' 때 콜론타이라는 이름이 피고인 명단에서 빠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녀를 박해하지 않은 스탈린의 심사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 외교관이라는 점, 국내 정치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따위가 고려됐는지 모른다. 사연이 어찌 됐든, 콜론타이는 당 지도부의 정책에 투덜거렸으면서도 고종명한, 드문 스탈린 시대 관료였다.
콜론타이라는 이름을 소련 안팎에 결정적으로 알린 것은 그녀의 소설과 논문에 담긴 전투적 페미니즘일 것이다. 혁명 이후에 러시아인들은 이혼의 자유를 얻었지만 일부일처제를 여전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족은 혁명 러시아에서도 국가를 이루는 기본 단위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일처제와 마찬가지로, 혁명 러시아의 일부일처제도, 실질적으로는 일부다처제였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완전한'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한, 배타적이고 동등한 성애를 전제로 한 일부일처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소련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완전한 평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콜론타이의 견해는 적극적이었다. 혁명은 종국적으로 국가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해체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결혼이나 전통적 가족관계는 소유권에 바탕을 둔, 억압적이고 이기적인 과거의 유물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유연애' 또는 '자유결합'을 옹호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 관념에서 벗어난 참다운 사랑은, 콜론타이에 따르면, 남성이기주의와 여성의 노예적 억압을 끝장낸 평등한 관계 속의 사랑이어야 했다.
또 타인의 마음은 이해하고 들을 수 있을 뿐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동지적 사랑이어야 했다. 이 사랑은 그러므로 일부일처제 너머의 사랑이었다. 콜론타이는 이런 사랑을 '날개 달린 에로스'라 불렀는데, 이것은 좌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소란스러운 논쟁을 낳았다.
우선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콜론타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산업을 '날개 없는 에로스'의 대표적 예로 꼽았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성애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불평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 예사이니 말이다. 곧이곧대로 일부일처제를 구현한 사랑도 '날개 없는 에로스'일 것이다. 그 사랑은 배타적 사랑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프리섹스는 '날개 달린 에로스'인가? 콜론타이는 자유롭고 우연한 성적 결합이라 해서 그것이 다 '날개 달린 에로스'는 아니라고 방어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남녀 불평등 때문에, 그런 섹스는 여성을 착취하고, 자녀 양육의 의무와 함께 내팽개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콜론타이가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부른 사랑은 육아의 사회화를 전제한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양육을 사회가 책임지게 되면, 아이를 둔 여성도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지 않게 돼 상호 존중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콜론타이에 따르면 "노동자-어머니는 네 자식, 내 자식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단지 우리 자식들-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의 소설 <붉은 사랑> 의 주제가 이것이었다. 붉은>
그녀는 거기서 더 나아갔다. 소설 <삼대의 사랑> 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연인과 섹스를 한 여자를 윤리적으로 면책함으로써 에로스의 배타성을 가족 관계 내에서마저 충격적으로 거부했다. 그녀의 '날개 달린 에로스'에는 질투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삼대의>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콜론타이의 관점이 너무 낙관적이었든지 순진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해야 할 테다. 나로서는, 북유럽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다는 현대의 '프리섹스'와 콜론타이가 주장했던 '날개 달린 에로스'를 구별하지 못하겠다.
콜론타이의 에로스관(觀)을 동료들이 곡해한 측면도 있기는 하다. 그녀는 <혼인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관한 테제> 에서 "성욕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혼인관계>
그런데 이 문장은 "성욕의 충족은 한 잔의 물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라고 왜곡돼 퍼져나갔다. 그래서 콜론타이의 에로스 이론은 '물 한 잔 이론'이라고 불렸다. 레닌 역시 이 '물 한 잔 이론'을 격렬히 비판했다. 혁명 초기의 젊은이들에게 콜론타이의 '자유결합'론이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을 레닌은 위험스럽게 여겼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발걸음을 맞춰 성적 관계와 혼인 영역에서 하나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또 젊은이들에게 금욕적 자기 부정을 설교하는 것이 귀족적 부르주아적 위선이라는 점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생활의 방종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퇴폐적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물 한 잔 이론'은 비마르크스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궁창에 드러누워서 흙탕물을 마시려고 하겠습니까? 또는 많은 사람들의 입술로 가장자리가 더럽혀진 유리잔으로 물을 마시겠습니까?"라고 말했을 때, 그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에로스관의 옹호자인 것은 분명했다.
콜론타이는 멘셰비키였다가 볼셰비키로 넘어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과거를 지워버릴 만한 업적(예컨대 트로츠키의 군사적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레닌과의 관계가 더 껄끄러웠는지도 모른다.
콜론타이에 대한 내 견해는 어정쩡하다. 혁명 이후의 노동조합 옹호자 콜론타이, 관료주의 비판자 콜론타이를 나는 지지한다. 그러나 '자유결합' 옹호자 콜론타이, '날개 달린 에로스' 옹호자 콜론타이에는 덤덤하다.
비판적이 아니라 덤덤한 것은 그런 관점이 제 나름의 윤리적 근거를 마련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나는 프리섹스주의자가 아니고, 에로스는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 배타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프리섹스를 비난하지 않는다.
특히 그 프리섹스가, 콜론타이의 '날개 달린 에로스'처럼, 질투와 억압이 사라진 상호평등의 사랑이라면. 에리히 프롬 이래 상투어가 된, 소유의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을 꿈꾼 콜론타이가, '시궁창의 흙탕물'이나 '가장자리가 더러워진 유리잔'을 거론한 레닌보다는 훨씬 더 혁명적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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