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책과 처음 만나던 시절을 생각할 때 나에게 원초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의외일 수 있지만 경찰서와 순경아저씨이다. 소백산맥 허리 중턱쯤에 있는 고원의 아늑한 분지에 나의 고향 장수가 자리잡고 있다. 내가 소년 시절을 보낸 1960년대만 해도 장수에서 전주와 같은 대처로 나가려면 아흔아홉 고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곰티재를 넘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버스라기보다는 비행기를 타는 기분으로 그 고개를 넘곤 했다.
바깥세상과 만나기가 어려웠던 만큼 내 머리 속엔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상상된 이미지들로 가득했던 것 같다. 오늘날 우리의 하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손에 잡힐 듯한 아름다운 뭉게구름들이 푸른 하늘 속으로 솟구칠 때마다 그 구름들을 타고 여의봉을 휘두르는 손오공이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환상에 빠지곤 했던 기억은 아직도 새롭다.
그 판타지의 세계를 풍부하게 해준 것은 장수경찰서가 운영하는 어린이 문고였다. 담임선생님의 도장이 찍힌 표를 내면 자상해보였던 순경아저씨로부터 한 권씩 책을 빌려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은 그 때문에 행복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호랑이선생님으로 불리셨던 담임선생님의 하숙방에서 전기전집들을 빌려 읽었다. 6학년이 되면서 학교에 비로소 도서실다운 것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 때 접한 만화삼국지의 책 내음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소년의 정신은 경찰서의 미니문고에서 접한 동화들의 세계를 통해서 그 소읍의 사방을 둘러싼 산맥과 강들을 넘고 바다와 대륙 너머에 존재하는 마을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류사회의 다양성과 함께 인간의 영혼과 선악의 보편성에 대한 개념이 자연스럽게 그 시절 우리 작은 영혼들의 세계 속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가난하던 시절, 경찰서 한켠에 마련되어있던 작은 도서관의 추억은 내 고향에 대한 애틋한 기억의 한 가운데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이삼성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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