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렸다 먹는 떡갈비
"밥 먹는 데 보통 얼마나 걸리세요?"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을 한다. 음식 촬영 중간에 잠깐, 혹은 회의와 회의 사이에 짬을 내어 먹는다면 15분 이내여야 한다. 오전에 원고를 다 넘긴 후에 먹는 점심밥이라면 한 시간쯤 여유를 잡고 먹을 수 있다. 기다리는 손님들이 등 뒤에 한 줄로 서 있는 오장동 냉면집이라면, 내 아무리 여유가 넘치더라도 20분 내 식사를 끝내줘야 예의다.
혼자 한 끼 먹으러 들어간 백반 집에서 '천천히 먹고 더 있다 가라'고 이모님이 잡으시면 십분쯤 더 머물게 된다. 밥집에 돌아다니는 신문을 보거나, 무심히 틀어 둔 드라마 재방송을 보거나 하면서.
시간이 지나고 보면, 천천히 먹는 음식이 대체로 기억에 오래 남는다. 물론, 설탕을 한 티스푼 넣고 달큰하게, 맵게 비빈 오장동 함흥냉면이라면 5분만에 먹어 치웠더라도 그 맛이 쉽게 지워지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천천히 먹은 음식이 기억에 남는다는 말은 '대체로' 그렇더라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예를 들어 조물조물 석쇠에 펴 담고 45초마다 뒤집어가며 직화로 구워내는 떡갈비는 주문이 들어와야 굽기 시작하기 때문에, 먹을 자리를 잡고 앉아 15분 이상 기다려야 상에 나온다.
담양 맏며느리의 전통적인 레시피가 아니더라도 떡갈비는 한 점 먹기 위해 기다려야만 하는 음식이다. 빨리 익혀 먹기 위해 뼈를 발라내고, 고기 반죽을 얇게 만든다 해도 센 불에 2분만에 익혀 먹는 음식은 본래 아닌 것이다.
■ 천천히 굽는 로스트비프
서양 메뉴, 더 정확히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 중에도 이렇게 준비가 오랜 음식이 있다. '로스트비프(roast beef)'라고, 말 그대로 구운 소고기다. 서양요리 용어 중 '로스트'라는 말이 들어간다면, 천천히 익힌 요리라는 뜻. 우리식으로 말하면 '통닭구이'를 생각하면 되겠다.
너무 강하기 않은 불에 천천히 골고루 익도록 구운, 닭이든 양고기든 쇠고기든 기름을 쪽쪽 빼가며 오래 굽는 방식이 '로스트'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로스트비프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름이 많지 않은 부위를 올리브유, 향신료 등에 잠깐 재웠다가(허브를 다져 넣은 올리브기름을 고기 표면에 마사지하듯 바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일단 팬에 겉면을 굽는 과정을 거친다.
완성된 고기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요리용 실로 덩어리째 아물려 묶어주면 지방이나 수분이 빠져나가면서도 모양만은 탄탄하게 구워진다. 소금과 후추는 팬에 굽기 직전에 뿌리는데, 굽기 전 손질 단계에서 허브를 생략하고 시중에 나와 있는 고기 구이용 허브소금을 뿌려도 맛이 좋다.
천천히 굽고 있는 로스트비프를 처음 본 것은 미국에 사시던 큰이모네 갔을 때였다. 70년대 초반에 이민을 간 이모는 1975년에 딸 하나를 낳고, 미국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고기 반찬을 좋아했던 이모는 특별한 날이면 늘 로스트비프를 굽곤 했는데, 식탁에는 그래서 장조림처럼 썰어 낸 미국식 로스트비프와 쌀밥과 김치와 버터에 살짝 볶은 브로콜리 등이 한번에 차려지곤 했다. 주말이나 휴일 저녁 먹은 로스트비프는 다음날 딸내미의 도시락에 다시 등장했다.
얇게 썬 로스트비프를 한쪽에 버터를 바른 식빵이나 햄버거 빵 위에 얹고, 그 위에 토마토와 양상추, 얇게 썬 양파 따위를 얹어 만드는 샌드위치는 사촌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락 메뉴였다.
로스트비프를 먹으려면 준비부터 굽는 시간까지 두 시간은 걸린다는 걸 모두 알기에 누구도 이모를 보채지 않았고, 나처럼 잠깐 묵어가는 게스트조차 들뜨게 만들던 맛이었다.
■ 맛의 기억
엄마는 외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약밥을 때마다 이야기한다. 종일 기다려야 먹을 수 있었던, 천천히 가마솥에서 익혀야 제 맛이 나던 약밥을 외할머니 생전에 배웠어야 했다고 한다. 나는 외할머니 약밥보다 돌아가신 큰이모의 로스트비프가 더 먼저 떠오른다. 지금도 궁금하다.
특1급 쇠고기가 아니어도 무슨 방법으로 잡냄새 안 나게 손질했는지, 어떻게 구워서 겉은 바삭하고 고기 속은 촉촉했는지, 먹고 남은 로스트비프로 샌드위치를 만들 때 곁들이는 양상추는 소금, 샐러드기름, 과일식초말고 무슨 양념을 더 넣었는지. 마요네즈에 설탕이나 레몬즙을 넣었었는지.
친구가 단골이었던 밥집의 주인장과 2년 만에 재회하는 자리에 내가 있었다. 며칠 전 저녁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의 이모는 2년 전 건물 재개발에 밀려 갑작스레 밥집을 닫아야 했단다. 친구는 한 주에 최소 두 번씩은 먹던 밥집이 사라졌을 때 허탈감이 얼마나 컸는지 이야기했다. 연이 닿아 2년 만에 다시 먹게 된 손맛에 행복해하였다.
먹는 것에 대한 기억은 입으로부터 시작하여 창자 끝으로 끝나는, 온몸을 휘감는 체험이다. 기다렸다 먹는 음식은 기대와 인내가 더해져 그 기억이 진하다.
"내일 가서 먹지 뭐."라고 했던 음식을 더 이상 누군가가 만들어 줄 수 彭?되면, 그 맛은 이제 '추억'으로 넘어간다. 할머니의 약밥, 큰이모의 로스트비프가 아니어도 단골 백반집 하나 정도는 꼭 만들어 두어야 훗날 그리워할 추억도 생긴다.
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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