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과 자리를 가깝게 해 주시오. 사진에 서먹서먹하게 나면 안 되잖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른쪽에 앉은 삼성 이건희 전 회장과 약간의 틈이 보이자 의전 관계자에게 이같이 지시했다. 이 전 회장이 다가오자 "(우리가) 가까이 있는 사진이 나가면 뭔가 잘 되겠구나 하고 국민들이 안심할 것"이라고 조크했다. 취임 초 "재벌 개혁에 성공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노 전 대통령이 총수들과의 스킨십을 중시하는 모습은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로 비쳤다.
오찬에 참석한 총수 20여명이 노 전 대통령의 인간적 접근에 박수를 치면서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풀렸다. 2003년 6월 2일 청와대 인근 삼계탕 집에서다. 미국에서 열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이 성과를 거둔 데 고무된 노 전 대통령이 총수들에게 점심을 내는 자리였다.
집권 초 개혁에 긴장한 재계
방미를 수행한 이 전 회장은 뉴욕의 한 만찬에서 "노 대통령은 21세기 한국의 비전이자 희망"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다른 총수들도 아버지 부시 등 공화당 유력인사와의 친분을 활용해 노 전 대통령의 방미가 성과를 내도록 막후에서 지원했다.
노 전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과 삼계탕으로 점심을 먹는 모습은 신선했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서민체취가 물씬 풍겼다. 참여정부 출범 후 고강도 재벌 개혁으로 대립각을 세워온 정ㆍ재계가 화해와 협력무드로 돌아설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비쳤다.
그러나 화해무드는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삼계탕 오찬 후 곧바로 터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손길승 SK회장이 퇴진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총수들이 잇따라 수난을 당했다. 한나라당에 대한 불법 대선자금 제공 수사가 확산되면서 총수와 구조조정본부장이 줄줄이 소환됐다.
참여정부는 재벌을 손보지 않고는 경제민주화를 이룩할 수 없다며 전의를 다졌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총수의 참모조직인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고,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재계가 반발한 증권집단소송제, 상속ㆍ증여세 포괄주의도 도입됐다. 서슬푸른 분위기 속에서 LG와 SK가 구조본 해체 등 지배구조 개선안을 내놓았다.
노 전 대통령의 반재벌 시각은 해외 순방 횟수가 늘면서 누그러졌다. 총수들과 함께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사업장을 둘러보곤 "기업인이 애국자라는 점을 실감한다"고 강조했다. 2004년 10월 초 인도 순방 중 "국가대표가 저인 줄 알았는데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을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우리 상품인 것 같다. 기업인들이 벌여놓은 일이 상상을 뛰어 넘는다"고 칭찬했다.
총수들과의 회동이 늘면서 협력 분위기가 조성됐다. 투자 촉진 차원에서 출자총액제한제 완화, 삼성과 LG의 수도권 첨단 공장 증설 예외 허용 등의 선물을 줬다. 진보진영에선 재벌개혁이 껍데기만 남았다며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벌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비판을 감내했다.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재벌들을 선거자금 부담에서 해방시켜준 것은 정경유착을 해소하는 결정적 전기가 됐다.
반재벌에서 실용적 행보로
참여정부와 '불편한 동거'를 유지했던 총수들이 노 전 대통령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그들이 참여정부 기간 겪었던 복잡한 속내를 알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하지만 총수들은 조문을 통해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통한 경제체질 강화, 정경유착 근절을 위해 힘썼던 노 전 대통령의 진정성을 헤아리며 화해하지 않았을까 한다.
진보진영의 반발을 무릅쓰고 법인세 인하, 기업인 사면ㆍ복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단행한 것도 반재벌, 친재벌의 이념적 대립구도에서 벗어난 실용적 행보로 평가하지 않았을까 한다.
재벌은 어느 정권에게나 '뜨거운 감자'임에 틀림없다. 재벌의 문제점을 개혁하면서 경제 발전을 위한 파트너로 활용하는 것은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재벌정책은 이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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