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 파문을 둘러싸고 법원 외부 세력들이 이념대결 양상으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신 대법관의 처신과 이에 대한 다른 대법관들의 애매한 태도를 비판한 박시환 대법관의 발언이 모 언론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이 같은 분위기가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법원 내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재판권 독립이라는 원칙의 훼손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고 해법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법원 안팎에서는 외부 세력이 자신의 입맛대로 이념을 덧칠하는 것은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일 시민과 함께 하는 변호사의 모임(시변)은 이번 사태를 '제5차 사법파동'으로 언급한 박 대법관에 대해 "법관들의 집단행동을 선동한 박 대법관을 법관윤리위원회 또는 법관징계위원회에 회부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사실상 사법 쿠데타를 선동한 것"이라며 직격탄을 날렸고,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물러날 사람은 신 대법관이 아니라 박 대법관"이라며 비판 대열에 동참했다. 일부 언론까지 가세해 "법원 내부에 뿌리깊게 존재하는 이념적 편향이 그대로 노출됐다"며 이념의 날을 더욱 세웠다.
박 대법관의 행위는 법원 내부에서도 '법원의 어른인 대법관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본질인 신 대법관의 문제를 제쳐두고 '설화(舌禍)'에 휩싸인 박 대법관을 일제히 공격하는 것은 사태의 본말을 전도(顚倒)시킬 우려가 크다는 게 법원 안팎의 지적이다.
서울 소재 한 법원의 고위관계자는 "박 대법관이 민감한 시기에 부적절한 발언을 했지만 그의 행동에 색깔론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황당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 소장판사도 "박 대법관이 자신의 발언에 대해 (법원 내부 게시판을 통해) 공개적으로 해명하고 사과했음에도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발언을 한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평가했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형사법)는 "사법부에 특정 이념을 투영시키는 순간 사회적으로 분쟁을 조정하는 중립ㆍ완충지대가 사라져 사회 전체가 투쟁의 장으로 변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법원 수뇌부도 이번 사태의 본질은 이념논쟁이 아니라 '법원 내부에서 발생할 소지가 있었던' 재판개입이 현실화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신 대법관에 대해 '엄중경고' 조치를 내린 직후 법원행정처가 사법권 독립방안을 연구하기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올해 9월까지 결과물을 내놓겠다고 서둘러 발표한 것도 이 같은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법원행정처 고위관계자는 "과거 사법파동이 외부로부터 사법권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이었다면 이번 사태는 내부의 사법권 독립 침해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 대법원장이 소장판사들의 반발을 이해한다고 언급한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 하에 법조계에선 이번 사태의 해법은 사법부 스스로 찾도록 맡겨둬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다. 고위법관 출신의 한 원로 법조인은 "소장판사들이 릴레이 회의에서 신 대법관의 사퇴를 직접 거론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이념대결 등에 따른 또 다른 파문을 우려한 사려깊은 선택이었을 것"이라며 "신 대법관의 부당한 재판개입이 드러난 이상 신 대법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법원은 인사제도의 개선 등 사법권 독립방안 모색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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